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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개(尹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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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옥(汝沃)
호(號)회재(晦齋)
호(號)서파(西坡)
생년1494(성종 25)
졸년1566(명종 21)
시대조선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계손(尹季孫)
공신호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상세내용]

윤개(尹漑)
1494년(성종 25)∼1566년(명종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서파(西坡).

좌참찬 윤형(尹炯)의 종증손이며 현감 윤계손(尹季孫)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에 발탁되었으나, 대간들이 그를 연소하다고 하여 서경(署經)에 응하지 않으려 하자, 국왕의 적극적인 비호로 등용되었다. 이어서 승정원주서사간원정언을 거쳐, 1519년 이조좌랑으로서 인사에 관여, 사림을 등용함에 힘썼다.

그러나 이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이 몰려나자, 이에 관련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다시 내직으로 옮겨 세자시강원문학필선, 승문원부제조 등 한직을 역임하며 명나라와의 외교활동에 이바지하였다.

즉, 성절사(聖節使)사은사(謝恩使)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내왕하면서 명나라하린(夏麟)을 비롯한 내각 관원과 친교를 맺어 국위를 선양하였고, 1534년에는 명나라로부터 역청(瀝靑)‧백철(白鐵)‧이두석(泥豆錫)의 제조법을 배워왔고, 명나라의 조복(朝服)을 얻어와 의복제도를 개정하게 하였다.

1538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하게 되자, 충청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뒤 동지돈녕부사를 거쳐, 1543년 형조참판에 이르렀는데, 이때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편찬에 관여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좌윤을 지내고, 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첨정하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大尹)일파를 제거하자, 여기에 가담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2등에 책록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하여졌다. 예조판서로서 오래 근무하면서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하는 창황한 가운데서도 의식과 법도를 대략 정돈하였다.

한편, 1546년(명종 1)에는 외방학교의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교육제도를 바로하였고, 이듬해에는 윤원형의 편을 들어 윤원로(尹元老)를 외방으로 귀양보냈다.

1550년에 호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8년 동안 우의정을 역임하고, 1558년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가 천거한 간관 김계(金啓)가 광패한 언행으로 국왕에게 미움을 받자, 이를 옹호하다가 지탄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대간에 의하여 교언(巧言)으로 국정을 다스린다고 탄핵을 받고 재상에서 면직되어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가 되었다. 이는 당시 간흉들의 참소에 의한 것으로 겸임하고 있던 영경연사(領經筵事)의 지위에서도 물러났다. 곧 이어 윤원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자, 1563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궤장(几杖)을 받았다.

잔일에는 정통하였으나, 대체를 알지 못하였고 권세에 아부하였기에 사림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선조초 을사년에 책록되었던 녹훈이 삭탈되었다. 일찍이 김안국(金安國)을 사사하였으나, 학문에는 깊지 못하였고 교언으로 출세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명 : "개(漑)"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13丙子登明經科己卯以吏佐被斥爲外官以能漢語僅容於世明宗即位乙巳参偽勳封鈴平府院君忠順之變尹元衡使漑草啓不作以禮判不参賓廳會議或以知禮稱之而附元衡以致相位其餘不足觀也辛亥入相至左賜几杖入耆社丙寅卒年七十三
紀年便攷v13人中宗丙子登明經科己卯以吏佐被斥爲外官以能漢語僅容於世明宗即位乙巳参偽勳封鈴平府院君忠順之變尹元衡使草啓漑不作以禮判不参賓廳會議或以知禮稱之而附元衡以致相位其餘不足觀也辛亥入相至左賜几杖入耆社丙寅卒年
小華龜鑑v14字■■號懲庵晦齋孫肅宗朝兵判提學子彙貞
寒臯觀外史v1字汝沃號晦齋坡平人官左相
文獻攷略v7己卯後居村舍踰一紀因事入城尹漑來見曰吏曹郞有問訊乎正國曰落職一紀退居村中有時入城了無一問亦可觀世變也曰近者吏曹尊先生厚風掃地無餘故言者云吏曹亡矣思齋摭言
文獻攷略v17時景福宮重修垂畢沈連源尹漑以都監提調往審觀其外閣窓戶皆用斑子朱紅銅綠等眞綵大怒卽捉致該郞李仁健鎭項而責之曰惟大內寢室乃用眞綵而幺麽一微官敢欲取媚要譽毁法至此當論以毁棄制書之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