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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한(申光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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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시회(時晦)
호(號)낙봉(駱峰)
호(號)기재(企齋)
호(號)청성동주(靑城洞主)
호(號)석선재(石仙齋)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484(성종 15)
졸년1555(명종 10)
시대조선전기
본관고령(高靈)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신형(申泂)
조부신숙주(申叔舟)
저서『기재집』
공신호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상세내용]

신광한(申光漢)
1484년(성종 15)∼1555년(명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신시회(申時晦), 호는 낙봉(駱峰)기재(企齋)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조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며, 부친은 내자시정(內資寺正) 신형(申泂)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의 특혜를 받았다.

1513년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수찬교리정언공조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으로 경연의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이때에 중종이 학문을 장려하며 유학자를 우대하고 주야로 경연을 열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고금의 시무(時務)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으며, 1518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다.

이듬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이어서 다시 여주로 추방되어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8년 윤인경(尹仁鏡)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하자 대사성으로 복직되었다. 이어서 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한성부우윤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540년 대사헌이 되어 관기(官紀)를 엄히 하였다.

1542년 세자시강원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듬해에 형조판서를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544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인종 때에 대제학을 거쳐, 명종 즉위와 함께 우참찬이 되어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소윤(小尹)에 가담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3등에 책록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대제학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를 겸임하였다. 뒤에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이어 좌참찬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548년(명종 3)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고, 이듬해에 좌찬성이 되어 지성균관사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553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54년에 사직하고 그 이듬해에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 학문을 숭상하여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는 학도들이 그에게 운집하였다.

또한, 청렴하여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인사를 공정히 하고, 유일(遺逸)을 많이 등용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한유(韓愈)를 기준으로 하였고, 시문에 있어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다.

저서로는 『기재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企齋集
涪溪記聞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