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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필(洪彦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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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미(子美)
호(號)묵재(黙齋)
시호(諡號)문희(文僖)
생년1476(성종 7)
졸년1549(명종 4)
시대조선전기
본관남양(南陽[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형(洪泂)
공신호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상세내용]

홍언필(洪彦弼)
1476년(성종 7)∼1549년(명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土]). 자는 자미(子美), 호는 묵재(黙齋). 승지 홍형(洪泂)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진도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었다.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저작을 맡고, 이어 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

1509년 부교리로 승진하고, 이어 지평헌납을 역임한 뒤 1513년 장령으로 특진하고, 이어서 응교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에서 참지참의를 지내고, 우부승지에 재임 중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조광조(趙光祖)와 내외종간이기 때문에 그 일파로 지목되어 옥에 갇혔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풀려났다.

1524년 도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원악향리(元惡鄕吏)들이 외방의 공물(貢物)을 방납하는 것을 단속하였다.

그뒤 호조참판에서 시작하여 참판을 다섯 차례 역임하고, 1529년 이조판서에 올라 재임중 인사를 공정히 처리하였다. 이어 형조판서병조판서호조판서대사헌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대사헌을 여섯 차례나 지내면서 관기를 바로잡는 데 이바지하였다.

1534년 우찬성에 올랐으나 당시의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사이가 멀어져 남양으로 하향하였다가 1537년 김안로가 몰려나자 다시 호조판서로 들어와,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가 곧 좌의정에 이르렀다.

1545년(인종 1) 영의정이 되어 영중추부사영경연사를 겸하였으며,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첨정하자 윤원형(尹元衡)윤임(尹任)유관(柳權)유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려고 을사사화를 일으키니, 이에 가담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몸가짐이 검소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청빈하기로 유명하였다. 집안법도가 엄하여 그의 아들 홍섬(洪暹)이 큰 옷을 입지 않고서는 들어가 만나보지 못하였으며, 성현들의 글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성품이 나약해서 위태로운 말은 하지 않고 해될 것을 보면 반드시 피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를 싫어하여, 그의 신원 요청이 있어도 이를 제지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仁宗實錄
明宗實錄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蘇齋日記
竹窩閑語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