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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진(金楊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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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기(伯起)
호(號)허백당(虛白堂)
생년1467(세조 13)
졸년1535(중종 30)
시대조선전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휘손(金徽孫)

[상세내용]

김양진(金楊震)
1467년(세조 13)∼1535년(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堂).

부친은 진산군수 김휘손(金徽孫)이다.

7세에 능히 문장을 지어 서거정(徐居正)에게 크게 칭찬을 받은 바 있다. 장성하면서 정효항(鄭孝恒)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1489년(성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에 임명되었다.

1503년 부수찬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묘호추존(廟號追尊)을 극력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예천에 정배되었다.

1506년의 중종반정 후 귀양에서 돌아와 형조좌랑으로 기용되었고, 이어서 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면서, 당시 고리대금의 폐단이 큼을 지적하여 그 개선을 도모하였다.

1513년(중종 8) 역학에 밝다 하여 김안국(金安國)이행(李荇) 등과 더불어 사유(師儒)로 뽑혔으며, 1517년 남곤(南袞)의 추천으로 승지가 되었으나, 천거과(薦擧科)의 불편을 말했다가 사림들의 탄핵을 받아 영해부사로 전출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남곤 등이 정권을 장악하자, 형조참의로 불리어들어가 바로 대사간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도내에서 그의 사위 김윤종(金胤宗)이 죄를 범하고 도주하여 체포의 문제가 있었으나 무난히 임기를 마쳤다.

이어서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를 거친 다음, 이조예조참의를 각기 역임하였다.

이때에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김희(金禧)중종의 부마로서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호화저택을 짓는 공사를 벌이자, 그 불가함을 극론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황해도관찰사로 전출되었다.

그뒤 잠시 공조참판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한직(閑職)에 머물렀다.

1535년 왕이 송도에 행차했을 때, 유도재상(留都宰相)으로 숙위(宿衛)에 임하다가 죽었다. 성품이 파당을 싫어하고 꾸밈을 좋아하지 않았고, 음주를 즐기며 학문에 밝아 이행정희량(鄭希良)권달수(權達手) 등과 교유가 깊었다.

그의 학문은 특히 역학‧음양 및 복서(卜筮)에 통달하였다. 중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안동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