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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규(玄錫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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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장(德璋)
호(號)청단(淸湍)
시호(諡號)정경(貞景)
생년1430(세종 12)
졸년1480(성종 11)
시대조선전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현효생(玄孝生)

[상세내용]

현석규(玄錫圭)
1430년(세종 12)∼1480년(성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덕장(德璋), 호는 청단(淸湍).

호군 현효생(玄孝生)의 아들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손서(孫壻)이다.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집경전직(集慶殿直)에 초보(初補)되고, 여러 차례 옮겨 내섬시직장을 역임하였다.

1460년(세조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감찰이 되고, 이어 개성부도사성균관직장‧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예조정랑중추부경력을 역임하였으며, 사인으로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1472년 집의로서 언사(言事)를 활발히 전개하고, 경연에 참여하는 등 성종의 신임을 얻었다.

1474년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이듬해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1477년 승지들 사이의 불화로 좌승지 임사홍(任士洪), 우승지 한한(韓僩), 좌부승지 송순효(孫舜孝)가 문책되면서 체직되었으나 성종의 신임으로 유임되었다. 이어 대사헌으로 승진, 대간이 부당함을 논하자 3일 후에 또다시 형조판서로 승진되었다가 대간의 집요한 상소로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478년 사은사(謝恩使)명나라에 다녀왔고, 그해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유임을 청하자 1년간 더 유임하였다.

이듬해 윤필상(尹弼商)도원수로 한 여진정벌에 부원수로 차출된 김교(金嶠)를 대신하여 병마절도사의 직임까지 수행하였다.

1480년 유진장(留鎭將)으로서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공을 세워 우참찬이 되었다.

성품이 정직, 청렴하여 매사에 공의를 주장하였고, 명석한 판단으로 공사(公事)를 처리하는 등 성종 초의 정치에 공헌하였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참고문헌]

睿宗實錄
成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대표명현석규(玄錫圭)
석규(錫圭)
성명현석규(玄碩圭), 현석규(玄錫圭)
덕장(德璋)

명 : "석규(錫圭)"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4三復斯言爾等能盡乃職予甚嘉之設科取辛季琚等三十三人○七月以玄錫圭特授大司憲臺諫論其不可移授刑曹判書時錫圭爲都承旨洪貴達爲同副承旨任士洪韓僴孫舜孝等亦爲承旨適趙軾之妹嫁李諶早寡軾幷奪其臧獲趙氏與前縣監金㴻通
大東彙纂v4臣以爲過也上卽霽怒慰諭之曰殺諫臣者惟桀紂也予終不效唐太宗聽諫浸不如初繫爾于獄者以爾固執耳爾得無驚怖耶錫圭良臣也勿爲侵辱與之共濟國事也爾之慷慨不屈予甚嘉焉命政院饋酒國朝典謨
大東彙纂v4書玄錫圭爲小人比之盧杞王安石上盛怒鞫之禁府當以欺罔上命致闕庭責之曰欺罔罪當死爾今猶以錫圭爲小人耶爾謂錫圭爲盧杞王安石比予於德宗神宗歟對曰德宗用一盧杞神宗用一安石錫圭則兼二人之陰險奸邪而殿下用之臣以爲過也上
靑彙抄v1當死爾今猶以錫圭 爲小人耶爾謂錫圭 爲盧杞王安石 比予於德宗神宗 歟對曰德宗 用一盧杞神宗 用一安石錫圭則兼二人之陰險奸邪而殿下用之臣以爲過也上卽霽怒慰諭之曰殺諫臣者惟桀紂 也予終不效唐太宗 聽諫侵不如初
靑彙抄v1彦辛 論吏曹判書玄錫圭 爲小人比之盧杞王安石上盛怒鞠之禁府當以欺罔上命致闕庭責之曰欺罔罪當死爾今猶以錫圭 爲小人耶爾謂錫圭 爲盧杞王安石 比予於德宗神宗 歟對曰德宗 用一盧杞神宗 用一安石錫圭則兼二人之陰
靑彙抄v1錫圭 爲小人比之盧杞王安石上盛怒鞠之禁府當以欺罔上命致闕庭責之曰欺罔罪當死爾今猶以錫圭 爲小人耶爾謂錫圭 爲盧杞王安石 比予於德宗神宗 歟對曰德宗 用一盧杞神宗 用一安石錫圭則兼二人之陰險奸邪而殿下用之臣
靑彙抄v1爲過也上卽霽怒慰諭之曰殺諫臣者惟桀紂 也予終不效唐太宗 聽諫侵不如初繫爾于獄者以爾固執耳爾得無驚怖耶錫圭 良臣也勿爲侵辱與之共濟國事也爾之慷慨不屈予甚嘉焉命政院饋酒國朝典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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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