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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진(朴叔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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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정지(挺之)
생년1424(세종 6)
졸년1481(성종 12)
시대조선전기
본관음성(陰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흔(朴昕)
조부박순(朴淳)
처부윤치화(尹致和)
공신호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상세내용]

박숙진(朴叔秦)
1424년(세종 6)∼1481년(성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정지(挺之). 이조판서 박순(朴淳)의 손자이며, 증병조판서 박흔(朴昕)의 아들이다. 부인은 승지 윤치화(尹致和)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등과하여 진사가 되었고, 1453년(단종 1) 사용(司勇)으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에 뽑혀 정자를 거쳐 박사를 역임하였다.

「조천록(朝天錄)」을 써서 북경(北京)에 갔다 온 뒤 이조좌랑병조좌랑을 거쳐 예문관전한, 세자시강원문학보덕, 사헌부집의를 겸하였다. 이어 의정 김국광(金國光)을 따라 북경에 갔다 온 뒤 좌통례에 임명되었다.

그뒤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또 형조참의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권지정자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1464년 정랑으로 대책(對策)에 3등으로 합격하였으며,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정랑으로 국정문제에 대한 해결에 동의하는 결재를 끝내지 않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465년에도 승진 부탁을 받아 승진시켜준 혐의로 벌을 받았으나 곧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1474년 국장(國葬)에 공이 있다 하여 낭청으로서 녹비 1장을 하사받았고, 흉년이 들자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충청좌도경상우도에 파견되어 실정을 살폈다.

1477년 통정대부형조참의가 되고 이어 승정원좌 부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478년 가정대부이조참판부총관을 겸하고,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되었다가 곧 대사헌으로 옮기고, 개성부유수가 되어 경기도관찰사를 겸임하였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陰城朴氏世譜

[집필자]

한희숙(韓嬉淑)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