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예(李芮)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C774C608FFFFB1419X0
자(字)가성(可成)
시호(諡號)문질(文質)
생년1419(세종 1)
졸년1480(성종 11)
시대조선전기
본관양성(陽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전지(李全之)
조부이맹상(李孟常)

[상세내용]

이예(李芮)
1419년(세종 1)∼1480년(성종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가성(可成).

참의 이맹상(李孟常)의 손자이며, 첨지중추원사 이전지(李全之)의 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총민하고 독서를 즐겨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군기시직장(軍器寺直長)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이 되었다.

1443년 집현전박사가 되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동료 유효련(柳孝聯)과 다투어 유효련은 벌을 받았으나 그는 경연관이라 하여 용서받을 정도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계속 집현전에 들었다. 집현전부교리로 있을 적에 집현전직제학 신석조(辛碩祖)와 함께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의 명을 받아 3년 동안 365권을 완성하였다.

그뒤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전후 15∼16년을 집현전에 있으면서 유신(儒臣)으로서의 능력을 보였다.

세종이 죽고 문종단종조에서 부수찬집의 등을 맡아보았다. 세조가 즉위할 적에 이에 온건하게 대처한 탓으로 살아남아 판봉상시사가 된 이래, 첨지중추원사와 각 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1461년(세조 7) 사은사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가선대부의 위계에 올랐다.

1471년(성종 2) 황해도관찰사가 된 이래 이조참판대사헌개성유수 등을 거쳤다. 개성유수로 있을 적에 임금이 행행(行幸)하여 백성들이 송사가 없음을 보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려 포상하였다.

1476년 공조판서, 1480년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형조판서로 죽었다. 그는 『경국대전』이 완성될 적에 부녀의 재가금지와 재가녀 자손의 폐고(廢錮)를 서선(徐選)과 함께 추진하기도 하였다.

5대의 왕을 섬기면서 박학과 다문으로 문명과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강영철(姜英哲)
대표명이예(李芮)
예(芮)
성명이예(李芮)
시호문질(文質)
가성(可成), 만성(萬成)
눌재(訥齋)

명 : "예(芮)"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大東彙纂v20參議李芮爲副時相申文忠公啓曰金坐向南而芮以文官當北面今旣爲正副使宜令連坐光廟曰宰相何有是言有禮職二品爲三品官何得連坐王爵隨人有高下耶文忠失對而退近年有以雜技爲二品官與文官同爲提調則文官雖降一階使坐其上
大東彙纂v20世祖朝金中樞有禮以舌人職至二品嘗充赴京正使參議李芮爲副時相申文忠公啓曰金坐向南而以文官當北面今旣爲正副使宜令連坐光廟曰宰相何有是言有禮職二品芮爲三品官何得連坐王爵隨人有高下耶文忠失
文獻攷略v6副芮久屈時相申叔舟欲其遷職啓曰金座向南而芮以文官當北面今旣爲正副使宜令連坐上曰宰相何有是言有禮職二品爲三品官何得連坐王爵隨人有高下耶叔舟失對而退謏聞瑣錄通文館志
文獻攷略v6○世祖朝金有禮以舌人職至二品嘗充赴京正使參議李芮爲副芮久屈時相申叔舟欲其遷職啓曰金座向南而以文官當北面今旣爲正副使宜令連坐上曰宰相何有是言有禮職二品芮爲三品官何得連坐王爵隨人有高下耶叔舟失對
文獻攷略v6○世祖朝金有禮以舌人職至二品嘗充赴京正使參議李芮爲副久屈時相申叔舟欲其遷職啓曰金座向南而芮以文官當北面今旣爲正副使宜令連坐上曰宰相何有是言有禮職二品芮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