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鄭仲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C911BD80B1106X0 |
생년 | 1106(예종 1) |
졸년 | 1179(명종 9) |
시대 | 고려중기 |
본관 | 해주(海州)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공신호 | 벽상공신(壁上功臣) |

[상세내용]
정중부(鄭仲夫)
1106년(예종 1)∼1179년(명종 9). 고려의 무인. 본관은 해주(海州).
처음에 주(州)의 군적(軍籍)에 오르고, 개성으로 와 공학금군(控鶴禁軍)에 편입되었다가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이때 왕이 참석한 가운데 제석(除夕)의 나례(儺禮)가 베풀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나이 어린 내시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그의 수염을 태우므로 크게 노하여 김돈중을 묶어 놓고 욕보였다.
이 때문에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金富軾)의 노여움을 샀으나 왕의 중재로 무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신과 문신간의 대립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인종의 신임을 받아 근시(近侍)하였고, 의종초에 교위(校尉)가 되었다.
이때 산원(散員) 사직재(史直哉)와 더불어 봉쇄된 수창궁(壽昌宮)의 북문을 함부로 출입하다가 어사대의 탄핵을 받았으나 다시 왕의 중재로 무사하였다.
그뒤 벼슬이 올라 상장군이 되었다.
이때 의종은 음탕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주연을 베풀 때마다 문신은 함께 즐기고 무신들은 그 경비만을 맡아 허기와 추위에 떨었으므로 무신들 사이에 불만이 많았다.
1170년(의종 24)에 의종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였을 때 견룡행수(牽龍行首)인 산원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과 함께 반역을 결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뒤 왕이 연복정(延福亭)에서 흥왕사(興王寺)를 거쳐 보현원(普賢院)에 이르자 왕을 따라갔던 문신과 환자(宦者) 등을 살해하였다. 보현원에서 반란에 성공하자 곧바로 개성으로 들어가 궁궐과 태자궁을 휩쓸면서 대소의 문신 50여명을 죽이고 왕을 거제현(巨濟縣: 거제도)으로, 태자를 진도현(珍島縣: 진도)으로 추방하고, 왕의 아우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맞아 왕(명종)을 삼음으로써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정중부는 의종의 곽정동택(藿井洞宅)‧관북택(館北宅)‧천동택(泉洞宅) 등 네 사저와 거기에 축적하였던 수많은 재물을 이의민‧이고 등과 나누어 차지하였다. 그리고 문관직인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뒤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훈(勳) 1등에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다.
1172년 서북면판사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西北面判事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김보당의 잔당 장순석(張純錫)‧유인준(柳寅俊)을 따라 경주까지 왔던 의종을 이의민(李義旼)을 시켜 살해하였다.
또, 김보당이 죽음을 당할 때 모든 문신과 함께 꾀하였다는 거짓 진술을 듣고 그동안 화를 면하였던 모든 문신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준의(李俊儀)‧진준(陳俊) 등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을 타도하려고 난을 일으키자 3년만에 이를 평정하였다.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던 해에 문하시중이 되었는데 재물에 탐을 내어 남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農莊)을 소유하였고, 가동(家僮)과 문객(門客)들도 주인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일삼았다.
117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178년에 치사(致仕)하였다.
11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에게 아들 정균(鄭筠), 사위 송유인(宋有仁) 등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처음에 주(州)의 군적(軍籍)에 오르고, 개성으로 와 공학금군(控鶴禁軍)에 편입되었다가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이때 왕이 참석한 가운데 제석(除夕)의 나례(儺禮)가 베풀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나이 어린 내시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그의 수염을 태우므로 크게 노하여 김돈중을 묶어 놓고 욕보였다.
이 때문에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金富軾)의 노여움을 샀으나 왕의 중재로 무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신과 문신간의 대립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인종의 신임을 받아 근시(近侍)하였고, 의종초에 교위(校尉)가 되었다.
이때 산원(散員) 사직재(史直哉)와 더불어 봉쇄된 수창궁(壽昌宮)의 북문을 함부로 출입하다가 어사대의 탄핵을 받았으나 다시 왕의 중재로 무사하였다.
그뒤 벼슬이 올라 상장군이 되었다.
이때 의종은 음탕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주연을 베풀 때마다 문신은 함께 즐기고 무신들은 그 경비만을 맡아 허기와 추위에 떨었으므로 무신들 사이에 불만이 많았다.
1170년(의종 24)에 의종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였을 때 견룡행수(牽龍行首)인 산원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과 함께 반역을 결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뒤 왕이 연복정(延福亭)에서 흥왕사(興王寺)를 거쳐 보현원(普賢院)에 이르자 왕을 따라갔던 문신과 환자(宦者) 등을 살해하였다. 보현원에서 반란에 성공하자 곧바로 개성으로 들어가 궁궐과 태자궁을 휩쓸면서 대소의 문신 50여명을 죽이고 왕을 거제현(巨濟縣: 거제도)으로, 태자를 진도현(珍島縣: 진도)으로 추방하고, 왕의 아우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맞아 왕(명종)을 삼음으로써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정중부는 의종의 곽정동택(藿井洞宅)‧관북택(館北宅)‧천동택(泉洞宅) 등 네 사저와 거기에 축적하였던 수많은 재물을 이의민‧이고 등과 나누어 차지하였다. 그리고 문관직인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뒤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훈(勳) 1등에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다.
1172년 서북면판사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西北面判事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김보당의 잔당 장순석(張純錫)‧유인준(柳寅俊)을 따라 경주까지 왔던 의종을 이의민(李義旼)을 시켜 살해하였다.
또, 김보당이 죽음을 당할 때 모든 문신과 함께 꾀하였다는 거짓 진술을 듣고 그동안 화를 면하였던 모든 문신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준의(李俊儀)‧진준(陳俊) 등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을 타도하려고 난을 일으키자 3년만에 이를 평정하였다.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던 해에 문하시중이 되었는데 재물에 탐을 내어 남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農莊)을 소유하였고, 가동(家僮)과 문객(門客)들도 주인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일삼았다.
117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178년에 치사(致仕)하였다.
11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에게 아들 정균(鄭筠), 사위 송유인(宋有仁) 등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武人政權硏究(金塘澤, 새문社, 1987)
鄭仲夫(李宗馥,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80)
高麗史節要
高麗武人政權硏究(金塘澤, 새문社, 1987)
鄭仲夫(李宗馥,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80)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명 : "중부(仲夫)"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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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