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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걸(邊良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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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국화(國華)
시호(諡號)정의(貞毅)
생년1546(명종 1)
졸년1610(광해군 2)
시대조선중기
본관원주(原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변위(邊偉)

[관련정보]

[상세내용]

변양걸(邊良傑)
1546년(명종 1)∼1610년(광해군 2).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국화(國華). 예조좌랑 변위(邊偉)의 아들이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한 뒤, 용양위부장(龍驤衛部將)벽동군수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강계부사 등을 지냈다.

1583년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경원부(慶源府)에 침입하자 길주목사 겸 조방장으로 출전하였으나, 부하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시기한 주장(主將)의 무고로 서변(西邊)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 북변(北邊)의 여진족 침입을 방어한 공으로 순천부사가 되었고, 1591년에는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뱃길로 행재소에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창의사 김천일(金千鎰)과 협력하여 강화도를 방어하고, 조정의 명령이 충청도전라도에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어 충청도병마절도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97년 경기우도방어사(京畿右道防禦使)가 되었으며 1599년에는 훈련대장이 되었으나 문신‧언관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들 가운데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난을 일으키자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훈련대장에 복직되고, 이어 지중추부사지훈련원사가 되어 비변사의 군국(軍國) 대사에 참여하였다.

1604년 포도대장으로서 임진왜란 후 혼란한 장안의 치안을 바로잡았다. 살인사건을 함부로 다루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받아 동래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나 도총관수원부사방어사를 거쳐 제주목사로 재직중 관마(官馬)를 훔쳤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정의(貞毅)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