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명(柳致明)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0CE58BA85B1777X0 |
자(字) | 성백(誠伯) |
호(號) | 정재(定齋) |
생년 | 1777(정조 1) |
졸년 | 1861(철종 1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유회문(柳晦文) |
모 | 한산이씨(韓山李氏) |
출생지 | 안동 |
저서 | 『정재문집』 |
저서 | 『예의총화(禮疑叢話)』 |
저서 | 『가례집해(家禮輯解)』 |
저서 | 『학기장구(學記章句)』 |
저서 | 『상변통고(常變通攷)』 |
저서 | 『주절휘요(朱節彙要)』 |
저서 | 『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 |
저서 | 『태극도해(太極圖解)』 |
저서 | 『대산실기(大山實記)』 |
저서 | 『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
[상세내용]
유치명(柳致明)
1777년(정조 1)∼1861년(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부친은 진사 유회문(柳晦文)이며, 모친은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으로 외가인 안동의 소호(蘇湖)에서 출생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유범휴(柳範休)‧정종로(鄭宗魯)‧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 장시도사(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된 뒤, 1835년(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뒤 초산부사‧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이 되고, 1853년(철종 4)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한성좌윤‧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고, 이어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그해에 석방되었다.
1856년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다음해에 85세로 죽었다.
초산부사로 있을 때에는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還穀)‧전결(田結)에 따른 시폐(時弊)를 교정하는 등 여러가지 치적을 쌓아 그곳 사민(士民)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짓기도 하였다.
그는 경학(經學)‧성리학‧예학(禮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自發的動靜)에 의하여 기(氣)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이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나오며, 이가 우주의 무체적인 실재(實在)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아 이진상(李震相)‧유종교(柳宗喬)‧이돈우(李敦禹)‧권영하(權泳夏)‧이석영(李錫永)‧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문집』‧『예의총화(禮疑叢話)』‧『가례집해(家禮輯解)』‧『학기장구(學記章句)』‧『상변통고(常變通攷)』‧『주절휘요(朱節彙要)』‧『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태극도해(太極圖解)』‧『대산실기(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
부친은 진사 유회문(柳晦文)이며, 모친은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으로 외가인 안동의 소호(蘇湖)에서 출생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유범휴(柳範休)‧정종로(鄭宗魯)‧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 장시도사(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된 뒤, 1835년(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뒤 초산부사‧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이 되고, 1853년(철종 4)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한성좌윤‧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고, 이어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그해에 석방되었다.
1856년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다음해에 85세로 죽었다.
초산부사로 있을 때에는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還穀)‧전결(田結)에 따른 시폐(時弊)를 교정하는 등 여러가지 치적을 쌓아 그곳 사민(士民)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짓기도 하였다.
그는 경학(經學)‧성리학‧예학(禮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自發的動靜)에 의하여 기(氣)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이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나오며, 이가 우주의 무체적인 실재(實在)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아 이진상(李震相)‧유종교(柳宗喬)‧이돈우(李敦禹)‧권영하(權泳夏)‧이석영(李錫永)‧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문집』‧『예의총화(禮疑叢話)』‧『가례집해(家禮輯解)』‧『학기장구(學記章句)』‧『상변통고(常變通攷)』‧『주절휘요(朱節彙要)』‧『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태극도해(太極圖解)』‧『대산실기(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定齋文集
朝鮮儒敎淵源
憲宗實錄
哲宗實錄
定齋文集
朝鮮儒敎淵源
[집필자]
박석무(朴錫武)
대표명 | 유치명(柳致明) |
성명 | 유치명(柳致明) |
성명 : "유치명(柳致明)"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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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