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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柳東說)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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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춘교(春郊)
생년1877(고종 14)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본관문화(文化)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평안북도 박천

[상세내용]

유동열(柳東說)
1877년(고종 14)∼미상. 독립운동가.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춘교(春郊). 평안북도 박천 출신.

1894년(고종 31) 일본에 건너가 세이쇼학교(成城學校)를 거쳐,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일본 근위사단에서 실무를 쌓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선천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싸웠다.

서울에 있던 조선주둔 일본군 6군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대한제국군에 복귀하였다. 대한제국군 무관학교와 유년학교 교관, 1905년 군무국에 전속되고, 그뒤 참령(參領)으로 승진하여 시위대 기병대장과 참모국 제2과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되면서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부터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김구(金九)양기탁(梁起鐸) 등과 신민회(新民會)조직에 참여하여 배일구국운동을 펼치고, 서북학회(西北學會)를 통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토(伊藤博文)살해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일본헌병대에 잡혔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뒤 만주로 망명, 1917년 노령 연해주(沿海州) 쌍성(雙城)에서 문창범(文昌範)김립(金立) 등과 같이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에는 서일(徐一)이 만든 중광단(重光團)에 입단하고, 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발표하였다.

1917∼1925년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초대참모총장을 역임하였고, 노백린(盧伯麟)과 교대로 총장직을 수행하였다.

한때 공산주의운동에 가담,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대회(高麗共産黨大會)에서 중앙위원이 되었다.

공산당운동을 한 배경을 보면, 1920년초의 시베리아 지방은 적군과 백계 러시아군과의 대립이 심각하여 일본군은 백계 러시아군을 원조하였고, 한국독립군은 적군에 협력하게 되었다.

더욱이, 러시아 혁명정부가 약소민족의 광복을 내세웠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희망을 걸며 편향된 것이다.

그뒤 공산주의와 인연을 끊고, 1930년 임시정부로 복귀하여 국무위원과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김규식(金奎植)지청천(池靑天)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단체들을 모아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미군정청 초대 통위부장(統衛部長)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당시 74세의 나이로 납북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집필자]

송남헌(宋南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