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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李商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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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호(季皓)
호(號)월남(月南)
생년1850(철종 1)
졸년1927
시대조선후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정치 > 정치가
이희택(李羲宅)
강릉유씨(江陵劉氏)
출신지충청남도 서천
저서『청년이여』
저서『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
저서『진평화(眞平和)』
저서『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
저서『청년회문답』
저서『상정부서(上政府書)』
저서『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상재(李商在)
1850년(철종 1)∼1927년. 정치가‧민권운동가‧청년운동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 출신.

부친은 이희택(李羲宅)이며, 모친은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고종 1)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오리(汚吏)들의 매관매직행위 때문에 낙방거사가 되었다. 이를 개탄,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이장직(李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비서일을 보았다.
1. 신사유람단 참가
1881년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準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안종수(安宗洙)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2. 대한제국 관직
1884년 신관제에 의하여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이 그를 주사로 임명하였으나, 그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하여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경연각 참찬, 학부아문참의학무국장이 되었다.

이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기에 힘썼다.

이해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서도 나라의 운명을 걱정,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다가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둘째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 초대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3. YMCA에 관계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여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 이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구금‧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출판‧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가 되게 하였고,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놓았다.

1920년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서 1920년 미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때의 이른바 제2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김필례(金弼禮) 등 YMCA대표단을 인솔,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4. 신간회 참가
한편, 1922년에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사장, 1925년 제1회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서 한국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여러 번 사양 끝에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해 사망, 4월 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卞榮魯)가 비문을 썼다.

유저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진평화(眞平和)』『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청년회문답』『상정부서(上政府書)』 제1‧2,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등 다수가 있다.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月南李商在(李時琓, 中央書館, 1926)
月南李商在實記(金逌東, 月南李先生實記出版所, 1927)
月南李商在先生略傳(公報室編, 公報室, 1956)
나라사랑 9―월남이상재 특집호―(외솔회, 1972)
月南李商在一代記(金乙漢, 正音社, 1976)
월남이상재(전택부, 韓國神學硏究所, 1977)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전택부, 정음사, 1978)
月南李商在의 性格硏究(金聖泰, 省谷論叢 4, 1973)

[집필자]

전택부(全澤鳧)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