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金立)
[상세내용]
김립(金立)
1918년 한인사회당 창당에 참가한 주요 임원으로서 이동휘(李東輝) 위원장 체제의 교통부장 연락책(連絡責)을 역임하였다.
1919년 8월 이동휘와 함께 상해(上海)로 이동하여 상해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이 되어 국무원총리 이동휘와 함께 1920년 봄부터 공산주의자그룹을 조직하고, 여운형(呂運亨) 등 민족계인사들을 포섭하였다.
1921년 1월 종래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편, 같은해 5월에 창당선언, 강령 및 규약을 고려공산당 대표회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데 일역을 맡았다.
한편, 레닌집단으로부터 수령한, 이른바 모스크바 자금 중 그 일부(20만 루블)를 1920년 12월 상해로 운반하였다. 상해임시정부에 이 사실을 감추고 비밀리에 보관, 이동휘와 공모하여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활용하려다가 폭로되어 임정분열의 파문을 일으켰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발생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집단과의 군권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혼자서 상해본부를 지키다가 1922년 2월 6일 상해 자베이(閘北)에서 테러분자에게 살해되었다.
1919년 8월 이동휘와 함께 상해(上海)로 이동하여 상해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이 되어 국무원총리 이동휘와 함께 1920년 봄부터 공산주의자그룹을 조직하고, 여운형(呂運亨) 등 민족계인사들을 포섭하였다.
1921년 1월 종래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편, 같은해 5월에 창당선언, 강령 및 규약을 고려공산당 대표회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데 일역을 맡았다.
한편, 레닌집단으로부터 수령한, 이른바 모스크바 자금 중 그 일부(20만 루블)를 1920년 12월 상해로 운반하였다. 상해임시정부에 이 사실을 감추고 비밀리에 보관, 이동휘와 공모하여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활용하려다가 폭로되어 임정분열의 파문을 일으켰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발생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러시아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집단과의 군권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혼자서 상해본부를 지키다가 1922년 2월 6일 상해 자베이(閘北)에서 테러분자에게 살해되었다.
[참고문헌]
韓國共産主義運動史 1(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집필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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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