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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근(安明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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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항일기
본관순흥(順興)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황해도 신천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안명근(安明根)
생졸년 미상.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신천 출신. 안중근(安重根)의 사촌 동생.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감화를 받고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 등 신민회(新民會) 계통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이토(伊藤博文)포살사건이 있은 뒤에, 이완용(李完用)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로 가서 양병학교(養兵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배경진(裵敬鎭)박만준(朴萬俊)한순직(韓淳稷)과 자금모집을 추진하여 1910년 11월 황해도 송화신석효(申錫孝)로부터 3,000원, 신천이완식(李完植)으로부터 6,000원을 얻고, 신천의 민모(閔某)에게 10만원을 요구하여 준비하여 놓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으나, 민모가 재령헌병대에 밀고하여 이해 12월 평양에서 붙잡혔다.

뒤이어 군자금을 보관해두었던 배경진박만준한순직원행섭(元行燮) 등이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안명근사건, 즉 안악사건의 발단이었다. 안명근의 자금공작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던 황해도에서의 애국계몽운동(비밀결사 신민회의 사업의 일환), 특히, 교육운동과는 무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운동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하여 그 관계를 자백받고자 70여일간 고문, 회유하였으나 끝내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일제는 안악을 중심으로 160여명의 요시찰자를 붙잡아 ‘내란미수‧모살미수‧강도 및 강도미수죄’를 날조하여 18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그밖에 40여명에 대하여 거주를 제한하였다.

대부분 궐석재판으로 이루어진 판결결과는 안명근 종신형, 김구를 비롯한 7명은 15년형 등이었다. 이 안악일대에 대한 정치적 탄압은 평안남북도로 연장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신민회조직이 탄로나고 일제가 이들을 데라우치총독암살음모사건이라는 날조된 사건에 연루시킨 105인사건으로 되었다. 그는 10년간 복역 후 출옥,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성의란현(依蘭縣) 팔호리에서 죽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痛史
白凡逸志(金九, 高麗先鋒社, 1947)
安岳事件과 3‧1運動과 나(崔明植, 兢虛傳記編纂委員會, 1970)
朝鮮の開化思想(姜在彦, 巖波書店, 1980)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5)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