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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李東輝)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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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성재(誠齋)
생년1872(고종 9)
졸년1935
시대조선후기
본관하빈(河濱)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함경남도 단천

[상세내용]

이동휘(李東輝)
1872년(고종 9)∼1935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하빈(河濱). 함경남도 단천 출신. 아호는 성재(誠齋).

8세 때부터 향리 대성재(大成齋)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8세 때 지방관장의 잔심부름을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이용익(李容翊)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 후 육군 참령(參領)을 지냈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해산될 당시까지 참령으로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를 이끌어왔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군대해산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1909년 3월 군대동지 연기우(延基羽)김동수(金東秀) 등과 더불어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조직의 모의를 획책하였으나, 실패하고 잡혀 유배되었다.

그러나 미국인선교사 벙커(Bunker, D. A., 房巨)의 활약으로 10월 초순경에 해금되었다. 이해에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개화운동과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1년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105인사건에 연루, 투옥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한편, 그는 무관출신이었으나 교육문화사업에도 적지 않은 활동을 하였다. 강화도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도 미국인 선교사 벙커박능일(朴能一) 목사를 움직여 강화도에 합일학교(合一學校)를 설립하였고, 개성평양원산 등지에도 여러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민족계몽을 위한 단체로서 1906년 오상규(吳相奎)유진호(兪鎭浩)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1908년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발전시켰다.

국내에서의 여러 활동과 아울러 1915년경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여 거기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다.

1919년 8월말경 김립(金立)의 사위인 오영선(吳永善)을 대동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하여 상해(上海)에 도착, 취임 후 자파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민족진영인사 일부까지도 규합하여 1920년 봄 공산주의자그룹을 조직하였다.

이것의 발전형태로서 1921년 종래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으로 개칭하였다. 국무총리직에 있는 동안 모스크바레닌으로부터 200만루블의 원조를 받았으며, 그 중 40만루블을 고려공산당 조직기금으로 유용한 것이 임시정부에 발각되어 사임하였다.

한편, 만주간도 방면의 독립운동 무장단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왔다.

1920년말 간도의 독립군이 일본에게 쫓겨 밀산(密山)을 거쳐 시베리아의 이만으로 퇴각할 때에 긴급구호금으로 1만원을 보냈다.

비록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반일민족독립을 우위에 놓은 것이었다. 이동휘 자신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오직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운동자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국무총리 사임 후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史(金承學, 獨立文化社, 1965)
朝鮮獨立運動(金正明編, 原書房, 1967)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4)
韓國民族運動史料 第二輯―中國編―(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6)
大韓民國臨時政府史(李炫熙, 集文堂, 1982)
3‧1獨立運動과 臨時政府의 法統性(李炫熙, 東方圖書, 1987)
光復鬪爭의 先驅者(李炫熙, 東方圖書, 1990)
105人事件과 新民會硏究(尹慶老, 一志社, 1990)

[집필자]

이현희(李炫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2-04독립기념관 이동휘선생어록비를 참고하여 본관을 미상에서 하빈으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