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교헌(金敎獻)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AD50D5CCB1868X0
이명(異名)김헌(金獻)
자(字)백유(伯猷)
호(號)보화(普和)
생년1868(고종 5)
졸년1923
시대조선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김창희(金昌熙)
외조부조희필(趙熙弼)
출생지수원
저서『신단민사』
저서『단기실기(檀記實記)』
저서『홍암신형조천기(弘巖神兄朝天記)』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김교헌(金敎獻)
1868년(고종 5)∼1923년. 독립운동가‧대종교 제2대교주.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 뒤에 이름을 김헌(金獻)이라고도 하였다.

수원에서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부친은 공조판서 김창희(金昌熙)이며, 모친은 풍양조씨판관을 지낸 조희필(趙熙弼)의 딸이다.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옥당병조참의예조참의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대중계몽운동을 하였고,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의 좌절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만민공동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 『문헌비고』 편집위원이 되었고, 1904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 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동래부사에 재직할 때,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본인들의 경제침략에 맞서서 이권운동을 징치하다가 일본인들의 횡포로 일시 관계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그뒤 비밀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우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입회하여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참가하였다.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 감인위원(監印委員)을 겸직하였고, 1910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일찍이 민족의 기원과 민족사의 연구에 뜻이 깊었던 까닭에 대종교가 중광(重光)된 해부터 교인이 되어 각종의 문헌을 섭렵하여 교(敎)의 역사를 정립하는 한편, 영계(靈戒)를 받고 총본사(總本司)의 부전무(副典務)‧경리부장을 지내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남도본사전리(南道本司典理)‧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을 역임하였다.

1916년 9월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서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 敎主)에 취임하였다.

1917년 일본의 탄압을 피하여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東滿洲和龍縣)으로 옮기고 교세확장을 통한 독립운동의 강화를 꾀하는 한편, 동포들에 대한 독립정신교육에 전념하였다.

1918년 11월 해외에서 선언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수석으로 서명하여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해 12월 대종교 교인만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총재에 교단(敎團)의 지도자인 서일(徐一)을 담당하게 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하게 한 끝에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김좌진(金佐鎭)의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여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宣道布敎事業)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만주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붕괴되자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로는 『신단민사』『단기실기(檀記實記)』『홍암신형조천기(弘巖神兄朝天記)』 등이 있으며,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倧敎重光六十年史(大倧敎倧經倧史編修委員會, 大倧敎總本司, 1971)
獨立協會硏究(愼鏞廈, 一潮閣, 1976)
大倧敎의 獨立運動에 관한 硏究(朴永錫, 史叢 21‧22合輯, 1977)

[집필자]

김정신(金正珅)
대표명김교헌(金敎獻)
교헌(敎獻)
성명김교헌(金敎獻)

명 : "교헌(敎獻)"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東宮日錄v15講小學第五卷○自父老止不敢坐○余曰楊播家世敦厚敬兄如事親至老不倦寔後人之鑑法也敎獻曰睿敎切當矣
東宮日錄v15弘弟射殺駕牛妻告至再聞無所恠如此以後昆季之間能無間言而且李勣年老位高爲姊煮粥至於焚鬚於此可見其友篤也敎獻曰睿敎切當矣牛弘聞其弟射殺牛無所恠問顔色自若於此可見其平日莊重無疾言遽色也且李勣旣貴矣貴則易惰而親自
東宮日錄v15愛尤篤也世人或以財爭利至於此兩人不負亡友之寄予其子不受此其父之不言寄人相讓久之此可謂各盡其道眞美事也敎獻曰睿敎切當矣八十老人腸胃弱易饑氣體虛易寒與嬰兒無異況以溫公友愛之篤宜有撫問之勤也
東宮日錄v15家敬君之心老而不惰必下車軾路馬賜食如在上前執喪甚哀戚可謂忠孝兼全也敎子孫如是至嚴家法之美觀於此可知矣敎獻曰睿敎切當矣敬君孝親之節石奮能躬行愈謹故其子孫習於見聞亦以孝謹稱世矣
東宮日錄v15賣以共具○余曰建位高老白首而事不惰親不惰中帬身自浣滌不使他人父母之衣衾不現裏之意養志之道眞可謂孝子也敎獻曰睿敎切當矣
東宮日錄v15德義是徒益其怠也疏廣深戒此弊所賜金與卿族其享不立産業使其子孫勤力舊田不欲怠惰寔後世爲人父祖者之鑑法也敎獻曰睿敎切當矣增益田宅以貽子孫則倚以怠惰卒不能保矣此誠非徒無益而又害之也疏廣深知此弊故使其子孫勤力舊田
東宮日錄v15小學第五卷○自其遇飢歲則諸子止有小改○余曰公綽家法敦厚而仲郢克紹其父之志事叔如事親可謂有是父有是子也敎獻曰睿敎切當矣公權暮歸仲郢迎候馬首公權優待長姪安得不屢言止之而仲郢不以官達有小改可謂能事叔如父矣
東宮日錄v15可先失言不保身無足可言且以賈餗臧獲暗害門客於墻廡不知其由不明若此豈能永享其貴乎此雖小事後人所當勉戒也敎獻曰睿敎切當矣王涯罷相獲罪出住僧寺見僧供飯米甚佳問之則卽其家粮棄飯粒之流出溝中者爲僧者拾取洗乾再蒸者也
東宮日錄v16所欲不踰矩況凡人豈不終身自勉哉且三子之問孝各因其人長短答之以是警辭旨渾然聖人辭不迫切之意於此可見矣耳敎獻曰睿敎切當矣
東宮日錄v16弟子之侍坐夫子親聞敎誨服膺而勿失然後乃可成德矣雖在燕閑之暇潛心註釋益勉日新之工焉余曰所陳甚好當體念矣敎獻曰夫子此時不得其位未能爲政故或者之問如此而夫子引書之孝友施于有政答之此大學所謂不出家而成敎於國者也論
東宮日錄v16未之思也夫何遠之有此言極有涵畜意思深遠學者不以徒事口耳不求於心也是以君子貴近思之學矣寅昇曰睿敎切當矣敎獻曰鄕黨一篇卽記聖人容色言動而使後世之想見聖人者有起羹墻之慕也雖然如不能深究聖人之心而但求聖人之跡則是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