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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張志淵)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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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장지윤(張志尹)
자(字)순소(舜韶)
호(號)위암(韋庵)
호(號)숭양산인(嵩陽山人)
생년1864(고종 1)
졸년1921
시대조선후기
본관인동(仁同)
활동분야언론출판 > 언론인
장용상(張龍相)
출신지경상북도 상주
묘소창원군 구산면 현동리 독마산(犢馬山)
저서『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
저서『유교연원(儒敎淵源)』
저서『위암문고(韋庵文稿)』
저서『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
저서『동국역사(東國歷史)』
저서『대동문수(大東文粹)』
저서『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
저서『대한기년(大韓紀年)』
저서『일사유사(逸事遺事)』
저서『농정전서(農政全書)』
저서『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
저서『소채재배전서(蔬菜栽培全書)』
저서『화원지(花園志)』
저서『숭산기(嵩山記)』
저서『남귀기행(南歸紀行)』
저서『대동시선(大東詩選)』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장지연(張志淵)
1864년(고종 1)∼1921년. 언론인.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지윤(志尹)‧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경상북도 상주 출신. 장용상(張龍相)의 아들이며.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1. 관직과 사회활동
1894년(고종 31) 진사가 되고, 1895년 10월 일제의 민비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발송하였고, 1896년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였다.

한편, 사례소(史禮所)직원으로 『대한예전(大韓禮典)』편찬에 참여하고, 이듬해 내부 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같은해 7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898년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맹활약하다가 그해 말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할 때 체포, 투옥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출판사인 광문사(光文社)를 설립하여 정약용(丁若鏞)『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하였다.

1901년 황성신문사의 사장에 취임하여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2. 시일야방성대곡
1905년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하에 국권침탈의 조약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과 을사5적을 규탄, 국권회복을 위한 국민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논설을 써서 일제 헌병대의 사전검열을 거치지 않고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체포, 투옥되어 65일 후 석방되었으며, 『황성신문』도 압수 및 정간처분되었다.
3. 대한자강회 조직
1906년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국권회복을 위한 본격적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조양보(朝陽報)』 등에 전국민이 각성해서 실력을 배양하여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07년 1월 대구김광제(金光濟)서상돈(徐相敦) 등이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전개하자, 이 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키고자 신문과 잡지 등에 다수의 논설을 게재하여 전국민이 합심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해 7월 일제가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양위시키고,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법들을 잇달아 제정하자,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함께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8월 19일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되자, 11월에 권동진(權東鎭)남궁 억(南宮檍)여병현(呂炳鉉)유근(柳瑾)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발기하여 조직하였다.
4. 언론활동
1908년 2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정순만(鄭淳萬) 등이 간행하고 있던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에 취임하였다.

재정난으로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상해(上海)와 난징(南京) 등 중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양쯔강의 배 안에서 일제의 첩자로 보이는 괴한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당하여 8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해조신문』에서의 격렬한 일제침략규탄이 문제되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나 얼마 뒤 석방되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의 교육구국운동단체인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의 취지문을 지어 지원하였으며, 학회의 편집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2월 대한협회의 「정정부문(呈政府文)」을 지었으며, 한편 신민회(新民會)에도 가입, 활약하였다.

1909년 10월 진주에서 발행되는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다시 언론구국운동을 계속하다가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병탄함에 따라 이에 항의하는 선비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경남일보』에 게재하여 일제를 규탄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남일보』가 폐간되자 활동무대를 잃었다.

1911년 이후 향리에 칩거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통탄하다가 1921년 마산에서 죽었다. 묘지는 창원군 구산면 현동리 독마산(犢馬山)에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5. 저술
저서는 『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유교연원(儒敎淵源)』『위암문고(韋庵文稿)』『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동국역사(東國歷史)』『대동문수(大東文粹)』『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대한기년(大韓紀年)』『일사유사(逸事遺事)』『농정전서(農政全書)』『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소채재배전서(蔬菜栽培全書)』『화원지(花園志)』『숭산기(嵩山記)』『남귀기행(南歸紀行)』『대동시선(大東詩選)』 등 많은 작품이 있다.

또한, 그의 저작을 수집하여 『장지연전서』가 간행되었다.
6. 친일 행적
그러나 장지연은 1916년에 매일신보에 조선총독 부임 환영시를 게재하는 등 1918년까지 일제의 식민정책을 미화, 장려하는 글을 다수 게재했다는 이유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 인사로 규정되어 비판받았다. 이로 인해 2011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가 결정되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나라사랑 5―장지연특집호―(외솔회, 정음사, 1971)
張志淵全書(檀國大學校東洋學硏究所, 1981)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4-06친일 행적 논란 사실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