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조(鄭範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BC94C870B1833X0 |
자(字) | 우서(禹書) |
호(號) | 규당(葵堂) |
시호(諡號) | 문헌(文獻) |
생년 | 1833(순조 33) |
졸년 | 1897(광무 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동래(東萊) |
활동분야 | 관료 > 대신 |
부 | 정기세(鄭基世)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범조(鄭範朝)
1833년(순조 33)∼1897년(광무 1)(주1)
. 조선 후기의 대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우서(禹書), 호는 규당(葵堂). 우찬성 정기세(鄭基世)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되고, 1860년 대교를 거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좌참찬에 승진한 뒤 1865년 이조참의, 1869년 성균관대사성‧규장각직제학‧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875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79년 공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 다음해 다시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자 당상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사대교린사당상(事大交隣司堂上)‧감공사당상경리사(監工司堂上經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1884년 병조판서 및 한성부판윤, 그리고 1886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와 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였으며, 같은해부터 수년간 여러 차례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갈된 국고를 맡아 타개책에 진력하였다.
1892년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졸년 |
국역 승정원일기 1897년(고종 34) 7월 27일 기사 "장례원 경 민영규(閔泳奎)가 삼가 아뢰기를, 궁내부 특진관 정범조(鄭範朝)가 이번 8월 23일에 졸서하였다고 합니다."를 참고. |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에 등용되고, 1860년 대교를 거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좌참찬에 승진한 뒤 1865년 이조참의, 1869년 성균관대사성‧규장각직제학‧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875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79년 공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 다음해 다시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자 당상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사대교린사당상(事大交隣司堂上)‧감공사당상경리사(監工司堂上經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1884년 병조판서 및 한성부판윤, 그리고 1886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와 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였으며, 같은해부터 수년간 여러 차례 호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갈된 국고를 맡아 타개책에 진력하였다.
1892년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高宗紀事
高宗時代史 1∼3(國史編纂委員會, 1967∼1969)
高宗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高宗紀事
高宗時代史 1∼3(國史編纂委員會, 1967∼1969)
[집필자]
조항래(趙恒來)
명 : "범조(範朝)"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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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2-07-19 | 국역 승정원일기 1897년(고종 34) 7월 27일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 1898을 1897로 수정.[수정자:양창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