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륜(鄭海崙)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D574B95CB1826X0 |
자(字) | 치종(稚宗) |
시호(諡號) | 문정(文貞) |
생년 | 1826(순조 26)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영일(迎日)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도(鄭淘) |
출신지 | 충청북도 충주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해륜(鄭海崙)
1826년(순조 26)∼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치종(稚宗). 충청북도 충주 출신. 정도(鄭淘)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봉사(奉事)로서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부교리가 되었고, 1861년에는 훈련원정으로 남묘전작례(南廟奠酌禮)때 대축(大祝)으로 참가, 가자(加資)되었다.
1866년(고종 3)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고, 1876년 용산 저자도(楮子島)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는 사소한 잘못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외직을 맡았고, 1879년 관찰사 재직 때 평산(平山)지방의 화적을 진압하고 화적 체포에 공을 세운 포교의 포상을 바라는 장계를 올렸다.
1881년 대사헌으로서 척사의 소를 올린 홍재학(洪在鶴)을 엄중 조처하자는 양사의 연차(聯箚)에 참여하였다.
그뒤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에 몇차례 임명되었고 1885년에는 동지사의 정사(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병조판서가 된 이후 공조‧예조‧이조‧형조 등의 판서를 여러 차례 중임하였으며, 의정부의 좌우참찬도 역임하였다.
1890년 춘천부유수에 제수되었지만 주로 내직의 주요요직을 지냈다. 그밖에 1891년에 한성부판윤도 역임하였으며, 1898년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임명되고 칙임관3등이 주어졌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으로 칙임관2등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858년(철종 9) 봉사(奉事)로서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부교리가 되었고, 1861년에는 훈련원정으로 남묘전작례(南廟奠酌禮)때 대축(大祝)으로 참가, 가자(加資)되었다.
1866년(고종 3)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고, 1876년 용산 저자도(楮子島)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는 사소한 잘못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외직을 맡았고, 1879년 관찰사 재직 때 평산(平山)지방의 화적을 진압하고 화적 체포에 공을 세운 포교의 포상을 바라는 장계를 올렸다.
1881년 대사헌으로서 척사의 소를 올린 홍재학(洪在鶴)을 엄중 조처하자는 양사의 연차(聯箚)에 참여하였다.
그뒤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에 몇차례 임명되었고 1885년에는 동지사의 정사(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병조판서가 된 이후 공조‧예조‧이조‧형조 등의 판서를 여러 차례 중임하였으며, 의정부의 좌우참찬도 역임하였다.
1890년 춘천부유수에 제수되었지만 주로 내직의 주요요직을 지냈다. 그밖에 1891년에 한성부판윤도 역임하였으며, 1898년 장례원경(掌禮院卿)에 임명되고 칙임관3등이 주어졌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으로 칙임관2등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高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성명 : "정해륜(鄭海崙)"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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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