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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교(趙性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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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유(聖惟)
시호(諡號)문헌(文憲)
생년1818(순조 18)
졸년1876(고종 13)
시대조선후기
본관한양(漢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형만(趙亨晩)
생부조형관(趙亨觀)

[상세내용]

조성교(趙性敎)
1818년(순조 18)∼1876년(고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유(聖惟). 조형관(趙亨觀)의 아들로 조형만(趙亨晩)에게 입양되었다.

1859년(철종 10)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866년(고종 3)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동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0년 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해 동지사의 정사로 재차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의정부좌참찬대제학을 지내고 1873년 다시 예조판서로 임명되었다.

이때 경무대(景武臺)에서 실시된 정시문과의 독권관(讀券官)이 되어 고종에게서 시관으로 공평무사하라는 명을 받들었다.

또한 예조판서 재직중 최익현(崔益鉉)대원군 탄핵상소가 있자, 호조판서 김세균(金世均) 등과 연소(聯疏)하였다. 최익현의 상소 중 국왕에게 개혁을 건의하는 논의가 없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죄였으므로, 처벌을 바란다고 하여 월봉3등지전(越俸三等之典)에 처하여졌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당시 극심한 수재로 전주 등 각읍의 민호(民戶)가 피해가 많으므로, 각종 세납물의 상납 기일을 늦추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전라도에 면포가 부족하므로 병조의 각 군문(軍門)과 각 아문의 번포(番布)를 돈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하여달라는 장계를 올리는 등 선정을 위하여 힘썼다.

1876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하원호(河元鎬)
대표명조성교(趙性敎)
성교(性敎)
성명조성교(趙性敎), 조성교(趙性教)

성명 : "조성교(趙性教)"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