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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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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찬겸(贊謙)
호(號)면암(勉菴)
생년1833(순조 33)
졸년1906(광무 10)
시대조선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호국 > 지사
최대(崔岱)
출신지경기도 포천
저서『면암집』
공훈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상세내용]

최익현(崔益鉉)
1833년(순조 33)∼1906년. 한말의 애국지사.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경기도 포천 출신. 최대(崔岱)의 아들이다.
1. 유년시절
6세 때 입학하여 9세 때 김기현(金琦鉉)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 때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擊蒙要訣)』『대학장구(大學章句)』『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통하여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으며,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2. 관력과 정치적 의지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출사한 이후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사헌부장령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70년(고종 7)에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수봉관‧지방관‧언관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고, 특히 1868년에 올린 상소는 경복궁(景福宮)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한 것이다.

이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또, 1873년에 올린 「계유상소(癸酉上疏)」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많은 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한편,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고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신들은 반발을 하여 도리어 대원군하야를 부자이간의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에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민씨일족의 옹폐를 비난하였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3. 우국애민‧위정척사운동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왕도정치적 명분이 상실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 첫 시도로서 1876년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운동‧청일전쟁 등 여러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하였던 때였다.

특히 1881년에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나 위정척사사상이 고조되고 있을 때 이 운동의 선봉에 섰던 그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성숙하게 된 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고루한 보수적인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항일정치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수단에 의한 개인적‧평화적이 아닌 집단적‧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고 위정척사사상도 배외적인 국수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오랫만의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각부군선유대원(各府郡宣諭大員)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당시 올린 상소는 1896년에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8년 「사의정부찬정소(辭議政府贊政疏)」와 재소, 「사궁내부특진관소(辭宮內府特進官疏)」와 재소, 1904년 「사궁내부특진관소」의 삼소‧사소, 「수옥헌주차(漱玉軒奏箚)」, 「궐외대명소(闕外待命疏)」와 재소‧삼소‧사소 등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수단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고 한편으로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의 포고문을 돌리고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를 발표하였다.
4. 역사적 역할과 의의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우국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그의 학문은 위정척사운동에 비하여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기본을 두고 있는 이항로의 학문을 이어받고 있었으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관심보다는 애국의 실천도덕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기론은 이항로의 설을 조술하고 스승의 심전설(心專說)을 계승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념은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구국애국사상으로, 또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위정척사사상의 역사적 역할과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최익현의 사우관계는 김기현이항로를 스승으로 하여 성리학을 배웠으나 후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고 학우관계는 이항로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인 이준(李峻)이박(李樸)임규직(林圭直)김평묵(金平黙)박경수(朴慶壽)유중교(柳重敎) 등 비교적 단순하였다.

저서는 『면암집』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의 대의비인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제향은 모덕사(慕德祠: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음.)포천해주고창곡성순화무안함평광산구례 등에서 봉향되고 있다.

[참고문헌]

勉菴集
梅泉野錄
韓國痛史
義兵運動史(金義煥, 博英社, 1974)
韓末의 民族思想(洪淳昶, 探求堂, 1975)
獨立有功者功勳錄 1(國家報勳處, 1986)
勉菴崔益鉉의 生涯와 思想(洪淳昶, 霞汀徐廷德敎授回甲紀念會學術論叢, 1970)

[이미지]

[집필자]

홍순창(洪淳昶)
대표명최익현(崔益鉉)
익현(益鉉)
성명최익현(崔益鉉)
찬겸(贊謙)
면암(勉庵)

명 : "익현(益鉉)"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高宗太皇帝行狀v1月罷都城門稅又罷願納及結歛皆宮役時所剏申命追奪昏朝罪人孝純己巳罪人來善玄逸官爵因戶曹參判崔益鉉疏請也益鉉疏辭戅甚群下請罪之竟優容奬擢人益服▣翕受之量焉十二月慈▣[帝(첨지페이지)]▣失火移御于昌德▣甲[帝
韓史綮v3江華武衛營之用水蔘者蔘新採出土者之名也○冬十月掌令崔益鉉上疏論宮役城門稅之弊正言權從祿阿大院君意構言益鉉疏中有瓊宮語是以君上比桀紂也請施竄流之典敎只鐫其職
韓史綮v3鉉言之甚切猶若亡國之憂及於眉睫者蓋吾旣惜大院君之不學無術不能培壅商業且不能援中國之稅制以曉民而復歎夫益鉉之徒言其病而不能進其藥也
韓史綮v3后在太皇則不敬所生更何所敬木源旣絶末流遂頹放縱貪饕無所顧忌家和失於前國政失於後遂以底於今日之覆亡者皆益鉉爲之也惜乎益鉉之從事講學而不講及於此也或謂國家重私親輕益鉉之疏未可深非是大不然夫國者所以載五倫之器也
韓史綮v3所生更何所敬木源旣絶末流遂頹放縱貪饕無所顧忌家和失於前國政失於後遂以底於今日之覆亡者皆益鉉爲之也惜乎益鉉之從事講學而不講及於此也或謂國家重私親輕益鉉之疏未可深非是大不然夫國者所以載五倫之器也今以威勢之尊嚴
韓史綮v3家和失於前國政失於後遂以底於今日之覆亡者皆益鉉爲之也惜乎益鉉之從事講學而不講及於此也或謂國家重私親輕益鉉之疏未可深非是大不然夫國者所以載五倫之器也今以威勢之尊嚴而蔑棄私親則是伹有君臣而無父子也何得曰國
韓史綮v3倒迎之親調膳以進大院君喜而食之旣食下殿行數步后在殿上大聲語曰朝鮮其必以大院君亡乎大院君聞而膽落居亡何益鉉疏發而見廢大院君遂痛恨后而日夜思報矣
韓史綮v3雖曰私親而太皇非大院君不生則父子之倫何嘗盡亡哉乃崔益鉉之論大院君其言陰賊暗啮與論他一介之臣同而無別夫益鉉旣非生於空桑者則何其頓忘父子之倫至於此哉大院君之所爲如㧕外戚振淹滯懲貪吏釐革軍布糶政之類皆救弊之善者
韓史綮v3而以其學疏而氣粗故一切矯激過中淺妄佻薄之事爲亦多有之苛而責之有足以喪國者然在太皇則父子之倫固自在也爲益鉉者不當以至誠惻恒之意光明宣著之詞顯揭大院君名號於章疏之中而勸告太皇使以孝道感格俾大院君油然含笑而退休
韓史綮v3參判升鎬趙大妃姪參判寧夏等謀所以令大院君退休者以爲崔益鉉能敢言冬十月從其前言罷城門稅隨除同副承旨召之益鉉至上疏論萬東廟等數條王褒陞戶曹參判於是益鉉乃復申論前所陳之事而加切之曰凡此數者之變亂成憲實在殿下幼沖
韓史綮v3休者以爲崔益鉉能敢言冬十月從其前言罷城門稅隨除同副承旨召之益鉉至上疏論萬東廟等數條王褒陞戶曹參判於是益鉉乃復申論前所陳之事而加切之曰凡此數者之變亂成憲實在殿下幼沖未專政之日未必皆自致也特因任事之臣壅蔽聰明
韓史綮v3位而惟在於親親之列者惟當尊其位厚其祿勿使干預國政語皆侵大院君大院君大怒闔門謝事於是文臣徐碩輔等上章言益鉉離間骨肉王親鞫碩輔縳懸之幾殊仍竄于黑山島益鉉亦陽罪之下獄旣又流之濟州初王后頗通書史饒權略善伺王意正甚
韓史綮v3國政語皆侵大院君大院君大怒闔門謝事於是文臣徐碩輔等上章言益鉉離間骨肉王親鞫碩輔縳懸之幾殊仍竄于黑山島益鉉亦陽罪之下獄旣又流之濟州初王后頗通書史饒權略善伺王意正甚寵之大院君見王禮敬稍弛內疑后間之一日入闕王后
韓史綮v3上疏言朝廷之和日本卽和西洋之漸也宜斥日本以淸其源竄之黑山島初李恒老常言淸人夷狄而西洋禽戰也身不服洋布益鉉師事恒老故有是論焉
韓史綮v3死却食者三日旣而知其訛而復食然却食之際氣已凘敗冬十二月卒年七十四日本人來弔仍送其喪尋又釋林炳瓉初帝以益鉉疏攻大院君內德之雖嘗罪其斥洋而非實惡之也故屢進官至贊政然益鉉亦以帝難與有爲一不受命焉○均十三道疆界
韓史綮v3十四日本人來弔仍送其喪尋又釋林炳瓉初帝以益鉉疏攻大院君內德之雖嘗罪其斥洋而非實惡之也故屢進官至贊政然益鉉亦以帝難與有爲一不受命焉○均十三道疆界
韓史綮v3義號召門徒及他儒生得七十人欲進據全州以爲根本然後入京見伊藤博文責其脅約行至淳昌郡全州地方隊兵擊敗之執益鉉及炳瓉以下十二人而北伊藤囚之司令部月餘送益鉉炳瓉于對馬島拘之餘皆笞而釋之○秋七月伊藤博文使人守闕門斷
韓史綮v3然後入京見伊藤博文責其脅約行至淳昌郡全州地方隊兵擊敗之執益鉉及炳瓉以下十二人而北伊藤囚之司令部月餘送益鉉炳瓉于對馬島拘之餘皆笞而釋之○秋七月伊藤博文使人守闕門斷巫瞽之途且令大小官無統監標不得入於是姜錫鎬恐
韓史綮v3使人守闕門斷巫瞽之途且令大小官無統監標不得入於是姜錫鎬恐禍及逃去○崔益鉉旣至對馬島有訛言島官將督斷髮益鉉誓死却食者三日旣而知其訛而復食然却食之際氣已凘敗冬十二月卒年七十四日本人來弔仍送其喪尋又釋林炳瓉初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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