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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金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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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선지(善之)
호(號)근와(芹窩)
시호(諡號)효간(孝簡)
생년1729(영조 5)
졸년1800(정조 24)
시대조선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상경(金相庚)
출신지충청도 연산

[상세내용]

김희(金熹)
1729년(영조 5)∼1800년(정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선지(善之), 호는 근와(芹窩). 충청도 연산 출신.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며, 부친은 김상경(金相庚)이다.

1762년(영조 38)에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봉사가 되었으나, 1773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77년(정조 1)에 초계어사(抄啓御史)에 선발되었다.

그뒤 1779년 지평규장각직각이조좌랑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교리로 재직시에는, 경성(京城)사대부들 중에 공물과 경저인(京邸人)이 내놓은 물건을 몰래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엄금하게 하되 만약 재상가라 하더라도 용납하지 말고 장오리(贓汚吏)의 율(律)을 적용시킬 것을 상소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780년에는 대사간대사성 등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의대사헌동지경연사평시제조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광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790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서 예조판서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임경업(林慶業)의 실기(實記)를 찬집한 바 있고, 이어 이조참판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793년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다툼에 인물을 천거한 것이 말썽이 되어 물러났다.

뒤에 다시 판중추부사를 거친 뒤 영중추부사가 되고, 1795년과 1797년에 동지 겸 사은사청나라에 다녀온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경학에 능하여 경전장구(經傳章句)에 정조의 고문구실을 하였다. 인품이 청백하여 사관들은 한사(寒士)와 같이 담소하다고 평하였다.

편서로는 『사계연보(沙溪年譜)』가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增補文獻備考
國朝榜目
號譜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대표명김희(金熹)
성명김희(金熹)
시호효간(孝簡)
선지(善之)
근와(芹窩)

성명 : "김희(金熹)"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