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중(李致中)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E58C911B1726X0 |
자(字) | 치화(稚和) |
생년 | 1726(영조 2) |
졸년 | 1802(순조 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현망(李顯望)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치중(李致中)
1726년(영조 2)∼1802년(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화(稚和). 이현망(李顯望)의 아들이다.
1761년(영조 37)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영조에게 서전(書傳)을 강하였고, 곧 이어 예문관검열에 뽑혔다. 정언‧지평‧헌납‧부수찬‧교리를 거쳐 1768년 3월 다시 부교리가 되었는데, 이해 8월 관북지방 농사의 참상이 보고되자, 왕은 그를 북도어사로 삼아 그들을 위유하게 하는 한편, 탄일(誕日) 및 동지(冬至)의 물선(物膳)을 탕감하게 하였다.
같은해 11월 다시 북관어사로 삼아 북도를 시찰하게 하였는데, 흉년이 심한 읍의 환자(還上)‧대동포를 탕감하게 하고, 해창(海倉)을 비워 곡식을 비축하여두지 않은 해당 수령을 파직하게 하고, 삼남지방과의 곡물거래를 허용하도록 주장하였으나 연변 읍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뒤 다시 수찬‧교리‧사간‧필선 등을 거쳐 1770년 다시 관동어사로 나가 민백흥(閔百興)의 탐장죄(貪贓罪)를 조사, 보고하여 이를 치죄하였고, 1774년 대사간이 되었을 때는 빈번한 과거의 실시로 인한 중비(中批)의 폐단을 논하고 이를 시정할 것을 건의하여 왕으로부터 가납(嘉納)을 받았다.
1776년 어사를 피마(避馬)하지 않은 죄로 파직당한 광주부윤(廣州府尹) 조진관(趙鎭寬)을 대신하여 광주부윤에 서임되었다가 1777년(정조 1) 이포(吏逋) 4,500석 때문에 광주의 전후 부윤이 치죄될 때, 시임(時任) 부윤으로 탈고신(奪告身)되었다.
그러나 곧 대사간‧대사헌으로 복직되고 178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듬해에는 원춘도관찰사(原春道觀察使)를 거쳐, 1787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을 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선비들의 폐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뒤 도총부도총관‧한성부판윤, 공조‧형조‧예조‧이조의 판서에 올랐다가 이안묵(李安黙)사건에 관련되어 다시 공조판서로 체임되었고, 다시 대호군‧우참찬‧좌참찬을 거쳐 1802년(순조 2) 지중추부사로 죽었다.
1761년(영조 37)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영조에게 서전(書傳)을 강하였고, 곧 이어 예문관검열에 뽑혔다. 정언‧지평‧헌납‧부수찬‧교리를 거쳐 1768년 3월 다시 부교리가 되었는데, 이해 8월 관북지방 농사의 참상이 보고되자, 왕은 그를 북도어사로 삼아 그들을 위유하게 하는 한편, 탄일(誕日) 및 동지(冬至)의 물선(物膳)을 탕감하게 하였다.
같은해 11월 다시 북관어사로 삼아 북도를 시찰하게 하였는데, 흉년이 심한 읍의 환자(還上)‧대동포를 탕감하게 하고, 해창(海倉)을 비워 곡식을 비축하여두지 않은 해당 수령을 파직하게 하고, 삼남지방과의 곡물거래를 허용하도록 주장하였으나 연변 읍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뒤 다시 수찬‧교리‧사간‧필선 등을 거쳐 1770년 다시 관동어사로 나가 민백흥(閔百興)의 탐장죄(貪贓罪)를 조사, 보고하여 이를 치죄하였고, 1774년 대사간이 되었을 때는 빈번한 과거의 실시로 인한 중비(中批)의 폐단을 논하고 이를 시정할 것을 건의하여 왕으로부터 가납(嘉納)을 받았다.
1776년 어사를 피마(避馬)하지 않은 죄로 파직당한 광주부윤(廣州府尹) 조진관(趙鎭寬)을 대신하여 광주부윤에 서임되었다가 1777년(정조 1) 이포(吏逋) 4,500석 때문에 광주의 전후 부윤이 치죄될 때, 시임(時任) 부윤으로 탈고신(奪告身)되었다.
그러나 곧 대사간‧대사헌으로 복직되고 178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듬해에는 원춘도관찰사(原春道觀察使)를 거쳐, 1787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을 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선비들의 폐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뒤 도총부도총관‧한성부판윤, 공조‧형조‧예조‧이조의 판서에 올랐다가 이안묵(李安黙)사건에 관련되어 다시 공조판서로 체임되었고, 다시 대호군‧우참찬‧좌참찬을 거쳐 1802년(순조 2) 지중추부사로 죽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신정희(申正熙)
대표명 | 이치중(李致中) |
성명 | 이치중(李致中) |
성명 : "이치중(李致中)"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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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