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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조(丁範祖)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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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법세(法世)
호(號)해좌(海左)
시호(諡號)문헌(文憲)
생년1723(경종 3)
졸년1801(순조 1)
시대조선후기
본관나주(羅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지령(丁志寧)
5대조정시한(丁時翰)
저서『해좌집』

[상세내용]

정범조(丁範祖)
1723년(경종 3)∼1801년(순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정시한(丁時翰)의 현손으로, 유학 정지령(丁志寧)의 아들이다. 세거지는 원주홍이헌(洪而憲)신성연(申聖淵)유한우(兪漢遇) 등과 친교가 깊었다.

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유생이 되었다가, 마침 동궁(東宮: 思悼世子)을 비난하는 유소(儒疏)가 바쳐지자 이에 반대하였다.

176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직서직장(社稷署直長)이 되었다가 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이 되었으나, 왕명을 받드는 데 지체하였다고 하여 잠시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이조좌랑에 서용되고 옥구현감을 거쳐 홍문록에 뽑히자, 그 문학의 재주를 평가한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의 천거로 수찬이 되었다. 이어 동부승지로 발탁되었으며, 왕명에 따라 「건공가(建功歌)」‧「백운고시(百韻古詩)」를 지어 바침으로써 그 시명이 조야간에 크게 드러났다.

그뒤 공조참의풍기군수를 역임하고, 정조초에 양양부사가 되어 부세를 줄이고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는 등 서민교화에 진력하였으나, 겸관(兼官)으로 있던 강릉에서 목상(木商)의 소나무 잠매(潛買)로 인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인 1781년 동부승지로 서용되고, 대사간을 거쳐 풍천부사가 되어 사직하였다.

1788년 예조참의로 서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92년 대사헌에 임명됨에 나이가 많음을 들어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예조참판개성유수이조참판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며, 2년 후 지돈녕부사가 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면서 형조판서에 승진, 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그뒤 78세가 되던 정조말년까지 조정에 머물며 예문관홍문관제학으로서 문사(文詞)의 임무를 맡았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정종행장찬술당상(正宗行狀撰述堂上)으로 차정(差定)되고 만장 7율 10수를 지었으며, 이듬해 실록청찬집당상으로서 『정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율과 문장에 뛰어나 사림의 모범으로 명성을 얻었고, 또 이로 인하여 영조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주력하던 정조에 의하여 당대 문학의 제1인자로 평가되어 7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 오랫동안 문사의 임무를 맡았다.

한편, 정치적 자세는 불편부당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당시의 탕평책에는 비판적이어서,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균용론(均用論)만 취하는 것이어서 사의(私意)가 횡행하여 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붕당을 없애기 위해서는 공정한 인사관리와 신의 있는 시책, 분명한 정치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문집으로 『해좌집』 39권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海左集

[집필자]

정만조(鄭萬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