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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의(李昌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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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방(聖方)
시호(諡號)익헌(翼獻)
생년1704(숙종 30)
졸년1772(영조 48)
시대조선후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태제(李泰躋)

[상세내용]

이창의(李昌誼)
1704년(숙종 30)∼1772년(영조 4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방(聖方). 세종의 아들 영해군(寧海君) 당(瑭)의 후손이며, 참봉 이태제(李泰躋)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로 초사(初仕)하였으며, 1737년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을 거쳐 이듬해 문학이 되었다.

1740년 홍문관교리, 수찬을 역임하고, 이듬해 북도독운어사(北道督運御史)가 되어 북도의 기민 구제를 위한 진곡(賑穀)1만곡을 수송하였다.

1744년 장령검상을 거쳐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747년 충청도관찰사, 이듬해 병조참판동의금을 거쳐 1749년 진하겸 사은부사로 연경(燕京)을 다녀와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호조참판을 거쳐 1752년 예조참판이 되어 동지 겸 사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호조참판도승지형조판서호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54년 판의금부사병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고, 1756년에 좌참찬, 1759년 이조판서에 이어 함경도관찰사병조판서경기도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64년 예조판서좌참찬을 거쳐 1767년 다시 병조판서좌빈객을 겸하고 이듬해 호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가 판중추부사로 옮긴 뒤 파직당하였다.

1772년 다시 우의정에 기용되었으나 곧 판중추부사로 옮겨 재직중 죽었다. 그가 죽자 부인은 단식하다가 절명하매 열녀로 정문이 세워지고 영조가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