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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보(李喆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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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보숙(保叔)
호(號)지암(止庵)
생년1691(숙종 17)
졸년1775(영조 51)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정신(李正臣)
전주유씨(全州柳氏)
외조부유이진(柳以震)
저서『지암집』

[상세내용]

이철보(李喆輔)
1691년(숙종 17)∼1775년(영조 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보숙(保叔), 호는 지암(止庵).

부친은 경기도관찰사 이정신(李正臣)이며, 모친은 전주유씨(全州柳氏)유이진(柳以震)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고 이어서 대교를 거쳐, 1729년(영조 5) 봉교로 승진하였다.

1731년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되고, 1733년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교리를 지냈다.

1734년 각 도에 기근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자 관서어사로 발탁되어 민정을 조사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였다.

특히, 관서지방에서 발생한 화월죄인(化越罪人) 김세정(金世丁) 등을 조사하여 처리하였다. 이어서 수찬에 승진되고, 1736년 왕명에 따라 경기도와 충청도에 암행하여 민정을 시찰하였다. 이어서 부응교응교를 지내고 사헌부로 옮겨 지평집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사간으로 옮기고 주청사(奏請使)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고 1741년 안변부사로 나가서 북방지대의 성곽을 수축하고 군기를 판비(辦備)하여 국방에 주력하였다.

1744년 대사간에 오르고, 1747년 다시 이천부사로 나갔다가 되돌아와서 도승지이조참판을 지냈다. 그해 동지부사(冬至副使)청나라에 다시 다녀오고 1749년 동의금부사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51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국조오례의』를 편수할 때 편집당상이 되었다.

1753년 동지춘추관사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사임하고 상소하여 삭과(削科)하여 줄 것을 자청하였다.

이듬해 나주에서 일어난 괘서의 변에 주모자인 윤지(尹志)와 그 추종자들의 공사(供辭)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자, 토역소(討逆疏)를 올려서 자기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죄인을 엄중처단할 것을 강조하였다.

1755년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연접도감당상(延接都監堂上)‧공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병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757년 치사하고 향리로 돌아오니 영조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수어사(守禦使)에 제수하고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이길보(李吉輔)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 데 이어 아들 이복원(李福源)과 손자 이시수(李時秀)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어 조선시대 최초의 삼세입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지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止庵集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