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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덕(李匡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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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성뢰(聖賴)
호(號)관양(冠陽)
생년1690(숙종 16)
졸년1748(영조 24)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진망(李眞望)
외조부박세채(朴世采)
저서『관양집』

[상세내용]

이광덕(李匡德)
1690년(숙종 16)∼1748년(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뢰(聖賴), 호는 관양(冠陽). 이경석(李景奭)의 현손이고, 탕평론을 최초로 주창하였던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자이며, 대제학 이진망(李眞望)의 아들이다.

진사로서 1722년(경종 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에 시강원설서로 임명되어 왕세제(王世弟: 뒤의 영조)를 보도(輔導)하였다. 소론 중 완소계열(緩少系列)의 일원으로서 송인명(宋寅明)조문명(趙文命)정석삼(鄭錫三) 등과 함께 탕평론을 주장하여 경종연간의 노‧소분쟁의 와중에서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 등 급소계열(急少系列)로부터 특히 심한 배척을 받았다.

1724년 정언부교리를 거쳐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민진원(閔鎭遠)을 구하려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遞職)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수찬교리에 임명되었다가 1727년(영조 3) 호남에 기근이 심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돌아와 이조좌랑을 지냈다.

이때 전에 조태억(趙泰億)의 아들 조지빈(趙趾彬)이조참의에 오르려는 것을 제어하여 조태억으로부터 미움을 받던 중, 홍문관 관원의 천거시비를 계기로 조태억조지빈과 심히 다투다가 대사간 조지빈과 함께 파직되었다.

1728년 1월 호남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해 3월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전라도 태인에서 이인좌의 일당인 박필현(朴弼顯)이 반란을 일으키자, 파직된 정사효(鄭思孝)를 대신하여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감사로 부임한 뒤 지방재정‧부세제도(賦稅制度) 등에 일대 개혁을 일으켜 크게 원성을 들었고, 1729년 부수찬 이양신(李亮臣)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소론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할 때에 함께 연루되어, 호남어사로 있으면서 역모를 미리 알았을 터인데 이를 묵인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무고하였으나 무사하였다.

같은해에 전주부 건지산(乾止山) 밑의 전답을 내수사(內需司)에서 옹주방전(翁主房田)으로 인수하려는 것을 거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문에 불경스러운 말들이 있다 하여 추고(推考)를 받음과 함께 이때부터 영조의 미움을 받았다.

이듬해에 중앙에 올라와 이조참의를 지내던 중 전라감사시절의 사소한 잘못으로 파직되었고, 1731년에 승지를 거쳐 다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 호남어사로 임명되었음에도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는다 하여 파직되었다.

1732년 다시 호남감진어사로 파견되었고, 1733년 강화유수로 임명되었음에도 끝내 응하지 않아 갑산부사로 좌천되었다가 대신들이 너무 심하다고 주청하여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뒤 예문관제학대사헌을 거쳐 1739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청나라에 다녀왔고 대제학예조참판을 지냈다.

1741년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이 일어났을 때 아우인 지평 이광의(李匡誼)김복택(金福澤)을 논죄하다가 국문을 받자, 광의를 구하려고 변론하여 정주에 유배된 뒤 다시 친국을 받고 해남에 이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과천에 은거하던 중 1744년 서용(敍用)하도록 명이 내려 한성부우윤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양하였다.

만년에는 급소계열로 당을 바꾸었으나 쓰이지 못한 채 죽었다.

저서로는 『관양집』이 있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冠陽集
黨議通略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대표명이광덕(李匡德)
성명이광덕(李光德), 이광덕(李匡德)

성명 : "이광덕(李光德)"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