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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섭(鄭彦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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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리(公理)
생년1686(숙종 12)
졸년1748(영조 24)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필동(鄭必東)

[상세내용]

정언섭(鄭彦燮)
1686년(숙종 12)∼1748년(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리(公理). 광주부윤(廣州府尹) 정필동(鄭必東)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17세에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는데 그에게 매우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1717년(숙종 43) 사마양시를 거쳐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27년 정언이 되었는데, 그 당시 송인명(宋寅明) 등이 탕평론을 주장하면서도 정론(正論)으로써 역적을 물리칠 것을 논하는 자는 비난하여 당습(黨習)이라 하니, 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차례 봉사(封事)를 올려 이의 시정을 청하였다.

또한 신치운(申致雲)박필운(朴弼雲) 등의 죄를 논책하고,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김일경(金一鏡)일파의 죄를 논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파면되었으나, 이듬해 청주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영조가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여 지평으로 복직시켰다.

1729년 동래부사, 이어 충청도관찰사동부승지광주부윤도승지한성부우윤병조참판삼화부윤안변부사 등을 지냈다. 이어 호조예조참판을 지내고 1741년 동지부사청나라에 다녀왔다.

글씨에도 능하여 동래부사 재임시 임진전망유해총비(壬辰戰亡遺骸塚碑)를 썼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臺山集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신해순(申解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