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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보(洪錫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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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양신(良臣)
호(號)수은(睡隱)
시호(諡號)충경(忠敬)
생년1672(현종 13)
졸년1729(영조 5)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산(豊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중기(洪重箕)
조부홍만용(洪萬容)
외조부이민서(李敏敍)

[상세내용]

홍석보(洪錫輔)
1672년(현종 13)∼1729년(영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신(良臣), 호는 수은(睡隱).

예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의 손자이고, 태복시첨정 홍중기(洪重箕)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의 딸이다. 개풍에서 세거하였으며,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6년(숙종 22) 사마시를 거쳐, 1699년 통덕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과옥(科獄)으로 급제자가 모두 삭방(削榜)되면서 한때 도배되었다.

그뒤 아버지의 권고로 다시 응시하여 170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검열설서정언수찬문학 등을 역임하고, 전라우도감진어사(全羅右道監賑御史)가 되어 민전에 대한 양전(量田)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였다.

1718년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정부에서 그의 말을 받아들여 양전을 실시하면서 옛날보다 짧은 자〔尺〕로 실시하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충청도균전사(忠淸道均田使)에 임명되자 자의 부당함을 들어 한사코 사직, 마침내 그의 말대로 옛 자를 사용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 병조참의승지대사간을 지내고, 1721년 동부승지로 노론 4대신과 함께 세제책봉(世弟冊封)을 주장하였다가 신임사화로 영암군에 유배되었으며, 다시 거제로 이배되었다.

1725년(영조 1) 은진에 양이(量移)되었다가 이해에 풀려나와 이조참의대사성대사헌도승지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가례원류(家禮源流)』사건으로 조정이 시비에 휘말렸을 때 윤증(尹拯)을 강력히 비난하여 한때 조정에서 쫓겨났으며, 전라우도감진어사 때에는 영남의 곡식 4만여 섬을 운반하여 멀리 제주의 백성들에게까지 은택을 입도록 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豊山世稿

[집필자]

김양수(金良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