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9년(숙종 25) 기묘(己卯) 증광시(增廣試)에 34명이 급제한 후 그 중 11명이 과거 부정으로 삭과(削科)를 당하였다. 11명은 이제(李濟)[역서부동 삭3년 충군(易書符同 削三年 充軍)], 김인지(金麟至)[환피봉적 엄형감사 제주위노(換皮封賊 嚴刑減死 濟州爲奴)], 이성휘(李聖輝)[換皮封賊 嚴刑減死 濟州爲奴], 홍석보(洪錫輔)[피수백탈(被囚白脫)], 홍만적(洪萬迪), 김일경(金一鏡), 박필위(朴弼渭)[換皮封賊 嚴刑減死 濟州爲奴], 송면(宋晟)[換皮封賊 嚴刑減死 濟州爲奴], 이수철(李秀哲)[換皮封賊 嚴刑減死 濟州爲奴], 이도징(李道徵)[換皮封賊 嚴刑減死 濟州爲奴], 이세정(李世禎)[외장차술 승복감사 용천충군 대술인정유석 동률(外場借述 承服減死 龍川充軍 代述人鄭維錫 同律)] 등이다. 그 중 이제(李濟), 홍석보(洪錫輔), 홍만적(洪萬迪), 김일경(金一鏡) 등 4명이 재급제를 하였다. 부정 합격자가 많아서 시험 전체를 파방하였다가 1710년에 나머지 사람들은 대간에 주청에 의해서 복과(復科)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