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민진후(閔鎭厚)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BFCC9C4D6C4B1659X0
자(字)정순(靜純)
호(號)지재(趾齋)
시호(諡號)충문(忠文)
생년1659(효종 10)
졸년1720(숙종 46)
시대조선중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유중(閔維重)
외조부송준길(宋浚吉)
저서『지재집』

[상세내용]

민진후(閔鎭厚)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아들이며, 모친은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유수 민진원(閔鎭遠)현감 민진영(閔鎭永)의 형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81년(숙종 7) 생원이 되고,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기사환국이 일어나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귀양살이를 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 다시 기용되었고, 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부응교사헌부집의 등을 거쳐 169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관찰사로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사간원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어 강화부유수형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뒤 1706년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다.

이때 유생 임보(林溥)가 세자모해설(世子謀害說)을 발설하여 일어난 옥사를 함부로 다루었다고 해서 소론측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1717년 또다시 기용되어 동지사(冬至使)청나라에 다녀온 뒤, 의금부판사돈녕부판사홍문관제학예조판서 겸 수어사한성부판윤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19년 의정부우참찬에 올랐으나 질병으로 사양하고, 그뒤 개성부유수로 재직중 죽었다.

그의 인품은 선비의 기운을 돋우고 사문(斯文)을 지키는 데 힘쓰며 외척의 호귀(豪貴)한 습속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글씨에 능하여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의 비문을 썼다. 경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지재집』이 전한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陶菴集
萬姓大同譜

[집필자]

한영국(韓榮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