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송상기(宋相琦)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1A1C0C1AE30B1657X0
자(字)옥여(玉汝)
호(號)옥오재(玉吾齋)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657(효종 8)
졸년1723(경종 3)
시대조선중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규렴(宋奎濂)
외조부김광찬(金光燦)
저서『옥오재집』

[상세내용]

송상기(宋相琦)
1657년(효종 8)∼1723년(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옥여(玉汝), 호는 옥오재(玉吾齋).

예조판서 송규렴(宋奎濂)의 아들이며, 모친은 동지(同知)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홍문관저작을 지내면서 문장에 능하고 학식이 풍부하여 홍문관에서 상주하는 글은 대개 그가 지었다. 박사검열을 거쳐, 부수찬으로 있을 때 희빈(禧嬪) 장씨(張氏) 어머니가 가마를 탄 채 대궐에 출입하므로 가마를 불태워야 한다고 청하였다가 파면되었다.

1689년 부교리로 복직되었으나 이해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이 사형당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민비(閔妃)가 복위되고 남인이 제거된 후 장령에 임명되어 부교리사간충주목사를 거쳐 보덕교리사인을 지냈다.

1697년 세자책봉에 대한 주청사(奏請使)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는 여러 번 정문(呈文)을 지었는데 문장(文狀)의 사리가 명확하여 청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돌아온 뒤 품계가 올라 승지가 되었다.

그뒤 노론의 중신으로서 대사성에서 예조‧이조의 참의가 되고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으며,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가 크게 치적을 올렸다. 대제학대사헌예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내고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718년 민회빈(愍懷嬪: 昭顯世子妃)의 시호 개정을 반대하다가 한때 파직되었는데 곧 예조판서에 기용되었다.

다시 이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다가 경종이 병이 있어서 세제에게 청정(聽政)을 시키자고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상소하였기 때문에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를 입어 강진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1725년(영조 1)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옥오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陶谷集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최호균(崔豪鈞)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