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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朴泰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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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원(士元)
호(號)정재(定齋)
시호(諡號)문열(文烈)
생년1654(효종 5)
졸년1689(숙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세후(朴世垕)
생부박세당(朴世堂)
외조부남일성(南一星)
저서『정재집』

[상세내용]

박태보(朴泰輔)
1654년(효종 5)∼1689년(숙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며, 모친은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당숙인 박세후(朴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을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년 부수찬수찬부교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문묘 승출(陞黜)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환수를 청함에 1682년 홍문관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 사가독서를 마치고 나서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하였으며, 호남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하여나갔던 바도 있다.

이어 응교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는데, 그가 부임하여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갔다 하여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서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적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조지겸(趙持謙)임영(林泳)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하여 여러 차례의 상소를 통해서 보여준 바와 같이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하였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豊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 『주서국편(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定齋集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