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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강(李彦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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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심(季心)
시호(諡號)정효(貞孝)
생년1648(인조 26)
졸년1716(숙종 42)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백린(李伯麟)

[상세내용]

이언강(李彦綱)
1648년(인조 26)∼1716년(숙종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심(季心). 이백린(李伯麟)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있으면서 이듬해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때 사간원정언으로 남인들의 공격에 앞장서서 윤휴(尹鑴)오정위(吳挺緯)허견(許堅) 등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경상도암행어사로 민정을 살폈으며, 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교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682년 통신사를 파견할 때 정사 윤지완(尹趾完)과 함께 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1685년에는 별차경관(別差京官)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으며, 이듬해에 승지에 발탁되었다.

1688년에 충청감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간 김주(金澍) 정언 김몽양(金夢陽)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고 귀양을 갔다.

5년 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도승지로 기용되고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96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곡식을 옮겨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으며, 형조판서를 거쳐 동지사(冬至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701년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장희재(張希載)처의 공초(供招) 및 윤순명(尹順命)의 공초 속에 이름이 나온 것으로 인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동지의금부사 김연(金演)의 변호로 무고함이 밝혀져 재등용되어 한성판윤을 거쳐 1710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지난날 무고를 당하였던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 경계하며 옥송(獄訟)을 잘 처리하여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관직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기지가 있고 영리하였으며, 또한 문장에 능하였다. 다만, 여러 차례 과거를 관장하면서 부정을 행하고 청탁을 받은 것 때문에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淸選考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