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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李嵇)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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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차천(次川)
호(號)현포(玄圃)
생년1635(인조 13)
졸년1715(숙종 41)
시대조선중기
본관덕수(德水)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경증(李景曾)

[상세내용]

이혜(李嵇)
1635년(인조 13)∼1715년(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차천(次川), 호는 현포(玄圃).

이경증(李景曾)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효종이 죽자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치열할 때, 성균관의 학생으로서 3년상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를 통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봉교(奉敎)로 임명되었다.

1662년 정언이 되고, 1665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권점(圈點) 6점을 받았으나 홍문관관원으로 기용되지는 못하였다.

그뒤 1668년 이조좌랑에 제수되었고 같은해에 해운판관(海運判官) 조가석(趙嘉錫)의 탐학과 비리가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을 때,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이를 비호한 것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1670년 다시 등용되어 부교리부응교사간 등을 거쳐, 다음해 삼남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암행을 마치고 돌아와 전라도 지방의 기근이 극심함을 아뢰고 남원무안진안현감을 파직하도록 계(啓)를 올렸다.

그뒤 동부승지우승지예조참의 등을 거쳐 1673년 대사간이 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성격이 온화하여 일찍부터 덕망을 얻어 중요관직을 역임하였다. 문예에도 조예가 있어 문장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이미지]

[집필자]

최진옥(崔珍玉)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