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가석(趙嘉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AC00C11DB1634X0 |
자(字) | 여길(汝吉) |
호(號) | 태촌(苔村) |
생년 | 1634(인조 12) |
졸년 | 1681(숙종 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양주(楊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계원(趙啓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가석(趙嘉錫)
1634년(인조 12)∼1681년(숙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여길(汝吉), 호는 태촌(苔村).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의 아들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해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주서로 임명되고, 1664년 대교‧봉교를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668년 해운판관으로 있으면서 벼슬과 재물을 탐했다 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된 바 있다.
1674년 장령이 되고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남인을 논핵하였다.
그뒤 1677년(숙종 3) 장악원정으로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의 신구(伸救)를 상소한 것이 사당을 옹호하였다 하여 삭직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등용되자 판결사로 기용되었고, 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예조‧병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참의를 지내다가 사임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해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주서로 임명되고, 1664년 대교‧봉교를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1668년 해운판관으로 있으면서 벼슬과 재물을 탐했다 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된 바 있다.
1674년 장령이 되고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남인을 논핵하였다.
그뒤 1677년(숙종 3) 장악원정으로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의 신구(伸救)를 상소한 것이 사당을 옹호하였다 하여 삭직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등용되자 판결사로 기용되었고, 이어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예조‧병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참의를 지내다가 사임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謙齋集
肅宗實錄
國朝榜目
謙齋集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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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