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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尹深)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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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현통(玄通)
호(號)징암(懲庵)
생년1633(인조 11)
졸년1692(숙종 18)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집(尹鏶)

[상세내용]

윤심(尹深)
1633년(인조 11)∼1692년(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현통(玄通), 호는 징암(懲庵). 참판 윤집(尹鏶)의 아들이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홍문관정자가 되었고, 봉교지평부교리부수찬이조좌랑 등을 거쳤다.

1664년에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정언 정창도(丁昌燾) 등과 창원현감의 파직을 청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제주시재어사(濟州試才御史)가 되어 제주도의 문무사(文武士)를 시험하였다.

또한, 제주의 해변 형세를 자세히 살펴 방비를 철저히 할 것과 먼 곳을 살필 수 있게 누대가 있는 배의 건조를 주장하였다.

1672년(현종 13) 헌납으로 있을 때, 사복시정(司僕寺正) 박지(朴贄)가 사대부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바가 많으니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1673년 집의가 되고, 다음해 뱃길에 밝다 하여 총호사(摠護使) 김수흥(金壽興)으로 뱃길을 살폈다.

1674년(숙종 즉위) 대사간에 오르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677년 과거의 시험관으로서 시험문제를 잘못 출제하였다 하여 연안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이조판서 오시수(吳始壽)의 천거로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해에 강화유수로서 진무사(鎭撫使)를 겸하였다.

1679년 개성유수가 되었고, 치수사업에 힘썼다.

또한,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 등과 함께 송시열(宋時烈)의 죄과를 규찰할 것을 청하였다.

1680년 파직되었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추방당하자 다시 기용되어 공조판서를 지냈고, 이어 병조판서를 거쳐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예서에 뛰어났으며, 부평의 행풍덕군수 권신중갈(行豊德郡守權信中碣)‧장단의 호조판서 이명비(戶曹判書李溟碑)‧양주의 지돈녕 정효준비(知敦寧鄭孝俊碑)‧청주의 보살사중수비(菩薩寺重修碑)‧춘천의 청풍부원군 김우명비(淸風府院君金佑明碑) 등을 썼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槿域書畵徵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김양수(金良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