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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규렴(宋奎濂)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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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도원(道源)
호(號)제월당(霽月堂)
시호(諡號)문희(文僖)
생년1630(인조 8)
졸년1709(숙종 35)
시대조선중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국전(宋國詮)
저서『제월당집』

[상세내용]

송규렴(宋奎濂)
1630년(인조 8)∼1709년(숙종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도원(道源), 호는 제월당(霽月堂). 이조판서 송국전(宋國詮)의 아들이고,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지평정언사예(司藝)응교서천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에는 수찬부교리정언헌납이조좌랑사간 등을 거쳐 1667년(현종 8)에 집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다시 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었다.

1674년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복상문제에 대하여 남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고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였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 등이 귀양가게 되자 이들의 신원(伸寃)을 주장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다시 기용되어 사간수찬대사간‧승지‧이조참의부제학대사성 등을 거쳐 대사간이 되어 시폐(時弊)4조를 올렸다.

그뒤 안변부사강양도관찰사(江襄道觀察使)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았다.

1694년 갑술옥사로 정국이 다시 바뀌게 되자 다시 부제학대사간대사헌우참찬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을 지내고 169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지중추부사우참찬예조판서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80세 때 지돈녕부사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송준길 등과 동종(同宗)‧동향(同鄕)으로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고, 전서(篆書)‧주서(籒書)에 능하였다.

회덕미호서원(美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제월당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김양수(金良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