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훤(李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74D6E4FFFFB1628X0 |
자(字) | 낙보(樂甫) |
호(號) | 도촌(道村) |
생년 | 1628(인조 6) |
졸년 | 1679(숙종 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상질(李尙質)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훤(李藼)
1628년(인조 6)∼1679년(숙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보(樂甫), 호는 도촌(道村). 교리 이상질(李尙質)의 아들이다.
1661년(현종 2) 천거에 의하여 영릉참봉(寧陵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을 거친 뒤 1665년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1669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으로 뽑혀 6품관에 올라 성균관전적‧정언‧헌납‧홍문관부수찬‧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71년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로 있을 때 지제교를 겸임하였고, 1673년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 의정부사인‧세자시강원보덕을 지낸 뒤, 홍문관응교에 재임시 유배당한 김수흥(金壽興)‧남이성(南二星) 등이 속히 환원되어야 함을 왕에게 요구하였으며, 대왕대비의 복제문제로 남인과 왕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곧 사간이 되었으나 종래의 예론복제문제(禮論服制問題)와 관련, 남인 일파가 일세유종(一世儒宗)인 송시열(宋時烈)을 비난 공격하는 여론을 계속 일으키고 있다 하여 그들에게 죄줄 것을 청한 계문(啓文)을 올렸다가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이때 도승지 김석주(金錫胄), 좌승지 안진(安縝) 등 승정원이 모두 왕명을 철회할 것을 극간하였으나, 파당을 옹호하는 태도를 용서할 수 없다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 순천부사‧인동부사‧첨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61년(현종 2) 천거에 의하여 영릉참봉(寧陵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을 거친 뒤 1665년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1669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으로 뽑혀 6품관에 올라 성균관전적‧정언‧헌납‧홍문관부수찬‧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71년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로 있을 때 지제교를 겸임하였고, 1673년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 의정부사인‧세자시강원보덕을 지낸 뒤, 홍문관응교에 재임시 유배당한 김수흥(金壽興)‧남이성(南二星) 등이 속히 환원되어야 함을 왕에게 요구하였으며, 대왕대비의 복제문제로 남인과 왕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곧 사간이 되었으나 종래의 예론복제문제(禮論服制問題)와 관련, 남인 일파가 일세유종(一世儒宗)인 송시열(宋時烈)을 비난 공격하는 여론을 계속 일으키고 있다 하여 그들에게 죄줄 것을 청한 계문(啓文)을 올렸다가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이때 도승지 김석주(金錫胄), 좌승지 안진(安縝) 등 승정원이 모두 왕명을 철회할 것을 극간하였으나, 파당을 옹호하는 태도를 용서할 수 없다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 순천부사‧인동부사‧첨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조원래(趙湲來)
호 : "도촌(道村)"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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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