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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리(徐祥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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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길(汝吉)
생년1602(선조 35)
졸년1659(효종 10)
시대조선중기
본관대구(大丘)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서경수(徐景需)
외조부김희(金僖)

[상세내용]

서상리(徐祥履)
1602년(선조 35)∼1659년(효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여길(汝吉).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서경수(徐景需)의 아들이며, 모친은 김희(金僖)의 딸이다. 인조 때 유생전강(儒生殿講)에서 장원하여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1630년(인조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다가 여러 조(曹)의 낭관(郞官)을 거쳐 시강원(侍講院)에 보직되고, 1635년 정언(正言)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호란 뒤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의 부묘(祔廟)를 적극 주장하여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뒤 지평(持平)장령(掌令)사간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에 특배(特拜)되었고, 교리수찬 등의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1644년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시 귀국하였다가 심양(瀋陽)으로 다시 돌아갈 때 세자의 보덕(輔德)으로 임명되어 수행하여 세자와 함께 돌아왔다.

이듬해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여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로 장례절차가 결정되자 앞장서서 『예경(禮經)』에 따라 세자의 예로 장사할 것을 주장하여 실행하게 하였다.

그뒤 부교리사간 등을 거쳐 1646년 별시문과의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다가 시권(試券) 가운데 옛날 사건을 인용하여 지금의 재상자(在上者)를 기만(譏慢)한 사건이 일어나 파직되었다가 곧 외직인 경성(鏡城)양주(楊州)남원(南原)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필선을 거쳐 동부승지로 있다가 1652년(효종 3) 경주목사(慶州牧使)를 지내고, 다시 돌아와 예조참의동부승지병조참의에 승서되었다.

1655년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듬해 승지가 제수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1-04문과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