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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중(金南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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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백진(白珍)
호(號)야당(野塘)
시호(諡號)정효(貞孝)
생년1596(선조 29)
졸년1663(현종 4)
시대조선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수렴(金守廉)
조부김명원(金命元)

[상세내용]

김남중(金南重)
1596년(선조 29)∼1663년(현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진(白珍), 호는 야당(野塘).

조부는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이며,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김수렴(金守廉)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1623년(인조 1)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 회답사(回答使) 정립(鄭岦)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1625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변경의 오랑캐 침입을 잘못 보고하여 파직당했다. 뒤에 곧 기용되어 수찬교리지평장령을 거쳐 1628년 부수찬이 되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병을 이유로 휴가를 청하였다가 연소한 관료가 나태하다 하여 두번째 파직되었다. 다시 장령으로 기용되어 그뒤 사간시독관부응교를 거쳐 1632년 집의가 되고 추숭도감도청(追崇都監都廳)을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강화도가 함락당한 데 대한 수장(守將)의 책임을 물어 처형할 것과, 척화신(斥和臣)을 문책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생일에 여러 읍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으며 전주에 내려가 가족과 어울려 가무연락(歌舞宴樂)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당하였다.

1641년에 대사간으로 기용되어 우부빈객도승지를 거쳐 1644년에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이 된 뒤 1649년(효종 즉위)까지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을 번갈아 지냈다.

1650년 이조참판이 되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을 거쳐 1656년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사은부사청나라에 다녀왔다.

1658년 공조판서에 오른 뒤 형조판서를 지냈고, 1661년 다시 공조판서가 된 뒤 형조판서예조판서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역대인감(歷代人鑑)』이 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명 : "남중(南重)"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0皆甘食惟東陽尉申翊聖翰林李之恒不食九王撤還世子以下皆随之陪従重臣南以雄大司諌朴潢參議金南重陞秩為賓客南重疏遞以朴代之武宰朴宗一李起築輔徳黃一皓兼輔徳茶裕後弼善曺文秀兼弼善李命雄文學閔應協兼文學李時楷司書徐
震史記略v4月六日上幸城山見九王八日世子發行嬪宮侍婢六人大君夫人侍婢四人陪從重臣南以雄大司諫朴潢金南重陞秩爲賓客南重疏遞朴魯爲代武宰朴宗一李起築輔德黃一皓兼蔡裕後弼善曺文秀兼李命雄文學閔應協兼李時楷司書徐祥履兼鄭雷卿
國朝捷錄v01字伯和孝大子慶恩府院君曾孫戊辰拜右南重五代孫命元七代孫祖後衍高進士一振本慶州
韓史綮v2順治十八年以金南重爲禮曹判書南重形神明秀操履端確光海主時以假注書入侍主愛之以其所幸姬之妹勸爲副室者屢南重終不應仁祖時以大司諫斥獜坪大君聚歛之非時論難之
韓史綮v2辛丑二年淸世祖順治十八年以金南重爲禮曹判書南重形神明秀操履端確光海主時以假注書入侍主愛之以其所幸姬之妹勸爲副室者屢南重終不應仁祖時以大司諫斥獜坪大
國朝人物志v3嘗與駙馬選宣祖視之曰他日必貴矣以假注書入侍光海見而悅聞其喪耦迫令以寵姬妹爲副室南重終不應仁祖丙子扈從南漢爲大司諫請誅江都守將勿罪斥和諸臣爲大司憲入對直斥
國朝人物志v3字厦卿號壽谷慶州人貞孝公南重孫五歲孤以不識父面爲至痛奉母訓惟謹常讀書至夜分不輟母禁止輒低聲不之聞丙子生員蔭補順安縣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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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