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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명(鄭弘溟)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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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용(子容)
호(號)기암(畸庵)
호(號)삼치(三癡)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582(선조 15)
졸년1650(효종 1)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학자 > 유생
정철(鄭澈)
문화유씨(文化柳氏)
외조부유강항(柳强項)
저서『기암집』
저서『기옹만필(畸翁漫筆)』

[상세내용]

정홍명(鄭弘溟)
1582년(선조 15)∼1650년(효종 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 또는 삼치(三癡).

부친은 우의정 정철(鄭澈)이며, 모친은 문화유씨(文化柳氏)유강항(柳强項)의 딸이다.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어려서 송익필에게 글을 배우고 약관에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주역』『근사록』 등을 배웠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은 그를 중히 여겨 국사(國士)로 대우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나 반대당들이 깎아버리므로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정자수찬이 되었다.

이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공주까지 갔다 돌아와 사간원정언헌납교리, 이조정랑을 거쳐 의정부사인으로 호당(湖堂)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27년에 사헌부집의병조참지부제학대사성을 역임하고, 자청하여 김제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인렬왕후(仁烈王后)가 죽어 상을 마친 뒤 예조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 적이 물러간 뒤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을 사양하다가 다시 함양군수를 지내고, 1646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곧 병이 들어 귀향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억지로 나왔다가 돌아갈 때 다시 대사헌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총명이 뛰어나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하였으며, 고문(古文)에도 밝았으나 김장생의 영향으로 경전(經傳)을 으뜸으로 삼았고 예학에도 밝았으며, 김장생의 학통을 이었다.

저서로는 『기암집』『기옹만필(畸翁漫筆)』이 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人物考
畸翁集

[집필자]

조준하(趙駿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