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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趙絅)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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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장(日章)
호(號)주봉(柱峰)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586(선조 19)
졸년1669(현종 10)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양(漢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익남(趙翼男)
외조부유개(柳愷)
저서『용주집』
저서『동사록(東槎錄)』

[상세내용]

조경(趙絅)
1586년(선조 19)∼1669년(현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峰).

부친은 봉사(奉事) 조익남(趙翼男)이며, 모친은 증좌승지 유개(柳愷)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대과를 단념,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현감경상도사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강화도에 파천하고 조정에서 화전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에 대하여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하였고, 이듬해 집의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뒤 응교집의 등을 역임하고, 1643년 통신부사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이어 형조참의대사간대제학, 이조형조판서 등을 거쳐,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查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하였다.

그뒤 노인직(老人職)으로 행부호군에 등용,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1년 판중추부사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포천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문암서원(文巖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주집』 23권 12책과 『동사록(東槎錄)』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집필자]

이범직(李範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