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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양(金時讓)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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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김시언(金時言)
자(字)자중(子仲)
호(號)하담(荷潭)
시호(諡號)충익(忠翼)
생년1581(선조 14)
졸년1643(인조 21)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舊])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인갑(金仁甲)
저서『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저서『하담집』
저서『부계기문(涪溪記聞)』

[상세내용]

김시양(金時讓)
1581년(선조 14)∼1643년(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舊]). 초명은 김시언(金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부친은 비안현감 김인갑(金仁甲)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607년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1610년 동지사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가 되어 문학을 겸하였고, 이듬해에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묘의(廟議)에 따라 도원수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하여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고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재차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고, 1636년 청백리에 뽑혀 숭록계(崇祿階)에 올랐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 『선조실록』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총재관(摠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역(實錄改修役)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하담집』『부계기문(涪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