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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수(李德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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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숙(汝淑)
호(號)이유당(怡愉堂)
생년1577(선조 10)
졸년1645(인조 23)
시대조선중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준(李浚)
생부이도(李濤)

[상세내용]

이덕수(李德洙)
1577년(선조 10)∼1645년(인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사로(師魯), 소자(小字)는 여숙(汝淑), 호는 이유당(怡愉堂). 이도(李濤)의 아들로 일족인 현감 이준(李浚)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0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가 되었다가 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이 일어나자 장인인 조수륜(趙守倫)과 함께 연루되어 이산으로 유배되었으며 1618년에 창평으로 이배되었다가 1621년에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용(收用)되어 전적에 임명된 뒤 예조좌랑춘추관기주관지평을 지내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조정랑으로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종사관이 되어 인조공주까지 호가하였다.

1632년 부수찬으로 왕세자 가례(嘉禮)에 공이 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634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강석기(姜碩期) 등과 인조의 사친(私親)인 원종(元宗)의 입묘(入廟) 논의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연산에 귀양갔다가 1636년에 풀려나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관서 지방에 무재(武才) 시험관으로 갔다가 병자호란을 당하여 부득이 돌아오지 못하고 영북(嶺北)으로 향하여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고 격려하다가 이듬해 돌아와 승지가 되었다.

그뒤 이조형조참의와 여러 차례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호란 후 청나라의 갖은 횡포가 심하자, 표면상으로 그들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641년 한때 강원감사로 나갔다 돌아와 이조참의로 있다가 죽었다. 뒤에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청주국계사(菊溪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