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흠(睦長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AA9C7A5D760B1572X0 |
자(字) | 우경(禹卿) |
호(號) | 고석(孤石) |
생년 | 1572(선조 5) |
졸년 | 1641(인조 19)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사천(泗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목첨(睦詹) |
외조부 | 정건(鄭謇) |
[관련정보]
[상세내용]
목장흠(睦長欽)
1572년(선조 5)∼1641년(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
부친은 이조참판 목첨(睦詹)이며, 모친은 증병조참판 정건(鄭謇)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봉교(奉敎)를 거쳐 전적(典籍)‧감찰‧사서(司書)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지평(持平)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판서 기자헌(奇自獻)의 미움을 받아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뒤에 직강(直講)‧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이어 응교(應敎)‧집의(執義)‧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역임하고, 1613년 좌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다가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연좌되어 청풍군수로 좌천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승지에 임명되고, 판결사‧함경도관찰사‧경주부윤 등을 거쳐 호조참판으로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를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1641년 도승지가 되었다.
성격은 강직하였고 관후(寬厚)한 덕량이 있어 사람을 대하는 성의가 화기애애하였다.
부친은 이조참판 목첨(睦詹)이며, 모친은 증병조참판 정건(鄭謇)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봉교(奉敎)를 거쳐 전적(典籍)‧감찰‧사서(司書)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지평(持平)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판서 기자헌(奇自獻)의 미움을 받아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뒤에 직강(直講)‧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이어 응교(應敎)‧집의(執義)‧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역임하고, 1613년 좌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다가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연좌되어 청풍군수로 좌천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승지에 임명되고, 판결사‧함경도관찰사‧경주부윤 등을 거쳐 호조참판으로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를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1641년 도승지가 되었다.
성격은 강직하였고 관후(寬厚)한 덕량이 있어 사람을 대하는 성의가 화기애애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존희(李存熙)
성명 : "목장흠(睦長欽)"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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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