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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일(權泰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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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수지(守之)
호(號)장곡(藏谷)
생년1569(선조 2)
졸년1631(인조 9)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춘란(權春蘭)
생부권춘계(權春桂)
저서『장곡집』

[상세내용]

권태일(權泰一)
1569년(선조 2)∼1631년(인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부친은 내시교관 권춘계(權春桂), 큰아버지인 집의 권춘란(權春蘭)에게 입양되었다. 구봉령(具鳳齡)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등용되고, 이어서 검열승정원주서시강원설서정언이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병으로 사임했다.

뒤에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이조정랑을 거쳐 영덕현령으로 4년간을 재임하면서 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이어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요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그뒤 풍기군수를 거쳐 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다시 호조참의좌부승지를 거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의 지방관을 희망, 죽주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가, 1623년(인조 1)에 좌승지로 들어왔으나 곧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그뒤 병조참의충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승진, 지방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이듬해에 대사간을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고, 그뒤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가도(椵島)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장곡집』이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대표명권태일(權泰一)
태일(泰一)
성명권태일(權泰一)
수지(守之)
장곡(藏谷)

명 : "태일(泰一)"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太師廟事績v2之歸可勝痛哉況且權昐權泰一重建主事而與尙憲生幷一世尙憲與泰一往復書札至今俱存座次先後之爭始發於尙憲而泰一答書中其略曰當初揭建之時已定神位之序至今七八百年永遵無改者必有意義何獨今日諉以子孫之盛衰而有所撓奪也
太師廟事績v2改之爲非禮乎不改爲非禮乎竊恐求以合禮而反爲撓奪謂之順祀而未免逆祀來書所謂非禮奉先之失亦德門之所當戒也泰一官至亞卿當世聞人與權昐同死之日若有捨前規而先爵之失則其答書安得如此尙憲久寓安東詳聞前事其再答亦安得無
太師廟事績v2中世以來上自天子下至士大夫宗廟之制皆用此例獨於三功臣位次以東爲上亦爲可疑也以東爲上之非禮尙憲已先言矣泰一答書明卞以東爲上之無稽則又其答曰以西爲上則張太師當爲第一由此論之東西主享姑未定也又曰未聞自古及今有以
太師廟事績v2若吏胥輩久掌而以爲祭禮訛誤之證援自不覺其辱先之歸可勝痛哉況且權昐權泰一重建主事而與尙憲生幷一世尙憲與泰一往復書札至今俱存座次先後之爭始發於尙憲而泰一答書中其略曰當初揭建之時已定神位之序至今七八百年永遵無改
太師廟事績v2前規而先爵之失則其答書安得如此尙憲久寓安東詳聞前事其再答亦安得無卞而遂寢其議乎久遠難變之說已在於尙憲泰一問答書中使壽一昌說等少知年代之久近窺見厥祖之古書則爵獻之失次非自權昐而始者便可知矣渠何敢以如此孟浪之
太師廟事績v2古主享而非指子孫之句管斷可知矣若自建廟之初金太師主享則先正豈不明卞之哉指錢穀非指主享尙憲亦不曾卞破於泰一之答而壽一疏中所不言今昌說又曰金太師主享自古無誤故文純公不卞也至於此記文有歉於臣宗故廢而不用反藉而爲
國朝人物志v2堂顏曰鑑源恬退不仕上謂近臣曰權春蘭不樂仕豈以予不足與有爲耶丁巳卒年七十九養弟之子參判泰一尸其祀東儒師友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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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