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金壽賢)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218D604B1565X0 |
자(字) | 정수(廷叟) |
호(號) | 둔곡(遁谷) |
시호(諡號) | 정헌(靖憲) |
생년 | 1565(명종 20) |
졸년 | 1653(효종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풍산(豊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진(金鎭)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수현(金壽賢)
1565년(명종 20)∼1653년(효종 4). 조선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수(廷叟), 호는 둔곡(遁谷). 장령 김진(金鎭)의 아들이다.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세자시강원사서를 거쳐 문학(文學)에 재임중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임진왜란으로 불탄 사고의 정비에 참여하였다.
그뒤 헌납‧전적‧예조정랑을 지낸 뒤 홍원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가 1610년(광해군 2) 호분위부사직(虎賁衛副司直)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수찬으로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는 언론활동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어 장령‧검상(檢詳)을 지낸 뒤 정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1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분승지(分承旨)가 되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우부승지‧호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곧 대사헌으로 전직되었다가 묘당(廟堂)에서 이조판서 이귀(李貴)와 서로 언쟁을 벌인 것이 화근이 되어 이후 계속적인 알력을 가져왔다.
그뒤 도승지‧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당할 때 이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의 주장으로 화의국서가 작성될 때도 척화를 끝까지 내세웠으며, 인조와 조신들이 모두 항복할 때도 연로함을 빙자하여 호종하지 않아 척화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
1644년 나이가 80세라는 이유로 예조참판으로 재직중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었고,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세자시강원사서를 거쳐 문학(文學)에 재임중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임진왜란으로 불탄 사고의 정비에 참여하였다.
그뒤 헌납‧전적‧예조정랑을 지낸 뒤 홍원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가 1610년(광해군 2) 호분위부사직(虎賁衛副司直)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수찬으로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는 언론활동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어 장령‧검상(檢詳)을 지낸 뒤 정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1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분승지(分承旨)가 되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우부승지‧호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곧 대사헌으로 전직되었다가 묘당(廟堂)에서 이조판서 이귀(李貴)와 서로 언쟁을 벌인 것이 화근이 되어 이후 계속적인 알력을 가져왔다.
그뒤 도승지‧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포위되어 항복을 강요당할 때 이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의 주장으로 화의국서가 작성될 때도 척화를 끝까지 내세웠으며, 인조와 조신들이 모두 항복할 때도 연로함을 빙자하여 호종하지 않아 척화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
1644년 나이가 80세라는 이유로 예조참판으로 재직중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었고,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典故大方
大東野乘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典故大方
大東野乘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성명 : "김수현(金壽賢)"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