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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具宬)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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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유(元裕)
호(號)초당(草塘)
시호(諡號)충숙(忠肅)
생년1558(명종 13)
졸년1618(광해군 10)
시대조선중기
본관능성(綾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구사맹(具思孟)
공신호호성공신(扈聖功臣)

[상세내용]

구성(具宬)
1558년(명종 13)∼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원유(元裕), 호는 초당(草塘).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아들, 인헌왕후의 오빠이다.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를 거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고 곧 박사로 올랐다.

1589년 승정원주서로 천거되었으나 종형이 한림(翰林)에 있어 상피(相避)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예조좌랑지제교를 거쳐,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기축옥사에 연루된 최영경(崔永慶)의 공초에 착오가 있어 파직되었다. 얼마 뒤에 병조좌랑으로 복직, 성균직강병조정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위하여 개성에 이르러 변란의 책임이 이산해(李山海)에게 있다고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이 일로 인하여 이산해평해에 유배되었다. 시강원문학지평을 거쳐 응교집의사간시강원필선을 역임하고, 1593년에 동부승지좌부승지첨지중추부사를 거쳐서 1594년 형조참의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96년 호조참판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장례원판결사해주목사를 지냈다.

1601년 대사성으로 승진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602년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기축옥사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서 홍주로 유배되었다가, 1604년 아버지상을 당하여 석방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나, 이때 대간의 심한 논핵(論劾)이 있었다.

1618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병으로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를 처벌하자는 대간의 논의가 있었으나 마침 병으로 죽었다. 인조반정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