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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구(宋英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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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수(仁叟)
호(號)일호(一瓠)
호(號)백련거사(白蓮居士)
시호(諡號)충숙(忠肅)
생년1556(명종 11)
졸년1620(광해군 12)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천(鎭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영(宋翎)

[상세내용]

송영구(宋英耉)
1556년(명종 11)∼1620년(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叟), 호는 표옹(瓢翁)일호(一瓠)백련거사(白蓮居士).

부친은 송영(宋翎)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4년(선조 17) 유학으로서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사과(司果)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종사관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관찰사종사관이 되었다. 정언을 거쳐 지평으로서 성절사(聖節使)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완산에 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99년 충청도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고 문학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이조정랑사인사간을 지내고 청풍군수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607년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곧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에 임명되고 이어 필선으로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613년 성절사명나라에 가서 일본과 수호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 공으로 지중추부사가 되고, 1616년 행사직(行司直)으로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하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고 또 낙서 등으로 비방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풍채가 단아하고 언행이 바르며 성격이 강직하였으나 남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해주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전주서산사(西山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정일(李貞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